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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당쟁 줄타기하던 임금, 서인의 손에 도끼를 쥐여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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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2면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신도비각. 사진가 권태균

선조 1년(1568) 사림의 영수 퇴계 이황(李滉)은 송나라 정이(程 이)의 ‘사물잠(四勿箴)’과 주희(朱熹)의 글·그림 등에 자신의 글과 그림을 덧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이를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좌우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겠다”는 선조의 말에 이황은 드디어 성리학이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시(國是)가 되었다고 여겼다. 성학(聖學)이 성리학이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림의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다.

국란을 겪은 임금들 선조② 정여립 사건

그러나 사림은 곧 분열되었다. 선조 8년(1575:을해년)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로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과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는데, 이것이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부 건천동(乾川洞)에,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에 붙은 당명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두 당을 화합시키려는 조제론(調劑論)을 제기했으나 동인들에게서 거듭 공격을 받고 본의 아니게 서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 초기에 선조는 서인 편을 들었다. 이황이 재위 3년(1570) 사망한 후 이이가 사림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선조는 재위 16년(1583:계미년) 이이를 공격하는 동인 허봉(許 봉)·송응개(宋應漑)·박근원(朴謹元)을 모두 귀양 보내 ‘계미삼찬(癸未三竄:계미년에 세 신하를 귀양 보내다)’이란 말까지 낳을 정도로 서인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듬해(1584:갑신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임금이 이이를 융성하게 대접하다가 사망한 후에는 은혜와 예절이 박절해졌다”고 적고 있듯이 생각이 달라졌다. 김시양(金時讓)의 『자해필담(紫海筆談)』은 재위 18년(1585) 선조가 대사헌 구봉령(具鳳齡)에게 “(귀양 간) 세 신하가 이이를 큰 간신(巨奸)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고 전한다. 구봉령은 “‘이이가 비록 간사하지는 않지만 경솔한 사람이며 그에게 나라를 맡기면 나라가 잘못될 것’이라고 답했는데, 그 후 오래지 않아 귀양 간 세 신하가 다 사면되었다”고 쓰고 있다.

선조의 마음이 변한 것을 간파한 동인은 공세에 나섰다. 홍문관에서 심의겸을 공격하자 선조는 “논한 바가 너무 옳아 더할 나위 없다”고 대답하고는 직접 전교를 내려 “국권을 마음대로 천단했다”면서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명종의 유조도 없었던 하성군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이렇게 조정에서 쫓겨났다. 인순왕후는 선조 8년(1575) 이미 사망한 후였다.

동인이 정권을 잡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鄭汝立)이 대표적이었다. 선조 16년(1583) 10월 이조판서 이이는 ‘정여립을 여러 번 천거해도 선조가 매번 낙점을 거부한다’면서 “혹 중간에 참소라도 있으신 것입니까?”라고 항의할 정도로 정여립을 아꼈다. 그러나 이이 사망 뒤 동인으로 돌아선 정여립은 이이를 비난했다. 『부계기문(<6DAA>溪記聞)』은 선조가 정여립의 면전에서 “정여립은 오늘의 형서(邢恕)로구나”라고 비판하자 정여립이 성난 눈으로 물러갔다고 전한다. 형서는 스승인 송(宋)나라 정이를 비판했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선 선조가 사간원 사간 한옹(韓<9852>) 등을 만나 ‘오늘날의 형서’ 운운한 것이라고 조금 달리 전한다. 이이의 천거를 대부분 수용했던 선조는 정여립에게는 내내 비판적이었다.

이런 와중인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유명한 정여립 사건이 시작된다. 선조는 야밤임에도 급히 3정승·6승지 등을 불러 모았는데 검열(檢閱) 이진길(李震吉)만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정여립의 조카이기 때문이다. 이 날짜 『선조실록』은 “황해도 안악(安岳)·재령(載寧) 등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을 의논하고 선전관과 의금부 도사를 황해도와 전라도 등으로 나눠 보냈는데 전라도의 정여립이 괴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모 고변은 황해도 감사가 했는데 그 괴수는 전라도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혹이었다.

『연려실기술』은 당초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과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명망이 있던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을 끌어들여 감사에게 연명으로 보고했다고 전한다. 동인 정권에 의해 사노(私奴)로 전락한 송익필(宋翼弼)의 사주설도 있듯이 의혹투성이의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동·서인은 각각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에서 동인의 기록엔 푸른 점(點)을, 서인의 기록엔 붉은 점을 찍어 표시했을 정도로 당파 간 입장 차가 뚜렷했다.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면 정여립의 사상을 먼저 추적해야 한다. 안방준(安邦俊)은 ‘기축기사(己丑記事)’에서 “정여립이 ‘유비(劉備)가 아니라 조조(曹操)를 정통으로 삼은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직필이며 유비를 정통으로 삼은 주자(朱子)가 틀렸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定主)이 있겠는가…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王 촉:연나라에 저항해 자결한 제나라 충신)이 죽음에 임해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안방준은 “정여립의 패역론이 이렇게 심했는데도 사람들이 다 설복당했다”며 “조유직(趙惟直)·신여성(辛汝成) 등은 ‘우리 선생의 이런 의논은 실로 고금의 선유(先儒)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비판했다. 이로 미뤄 정여립이 당시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사상을 가졌던 것과 이런 사상에 그의 지우들이 공감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는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여립이 전주·금구·태인 등의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매월 15일 활쏘기를 연습한 것을 문제 삼기도 하지만 선조 20년(1587) 왜구가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대동계가 왜구 격퇴에 나섰듯이 비밀 조직도 아니었다. 명재 윤증(尹拯)이 ‘황신(黃愼)행장’에서 좌의정 정언신(鄭언信)이 ‘정여립을 고변한 자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듯이 고변을 사실로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게다가 선전관 이용준(李用濬) 등은 ‘정여립이 자신의 서실(書室)이 있는 진안 죽도(竹島)에서 자결했다’며 아들 정옥남(鄭玉南)만을 잡아와 의혹은 증폭되었다. 훗날 남하정(南夏正:1678~1751)은 『동소만록(桐巢漫錄)』에서 “정여립이 진안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죽이고선 자살했다고 아뢰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선조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 파악에 주력해야 했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와 정여립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겹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선조실록』은 “(정여립이) 역적의 괴수가 되자 서인은 서로 축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동인은 간담이 떨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서인 강경파 정철(鄭澈)이 “역적을 체포하고 경외(京外)에 계엄을 선포하자”는 비밀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리자 선조는 그 충절을 칭찬하고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국문 수사 책임자)으로 삼았다.

사실상 동인에 대한 대량 살육을 허용하는 부월(<9207>鉞:도끼)을 준 셈이었다. 진상이 모호한 사건의 조사를 정적들이 맡았으니 가혹한 고문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좌의정 정언신, 부제학 이발(李潑)·이길(李 길) 형제, 백유양(白惟讓)·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 등 저명한 사대부들이 아무런 물증도 없이 죽어갔다. 조카 이진길은 불복하다가 매 맞아 죽는 등 연루자는 수없이 많았다.
북인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은 “이발·이길·백유양 등은 정철이 낙안(樂安)에 사는 선홍복(宣弘福)을 끌어들여 죽게 했다”고 적은 것처럼 동인은 사건 자체를 서인의 정치공작으로 단정했다. 이 사건으로 동·서인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