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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관료자본의 상징, 죽은 뒤 ‘청렴’ 인정받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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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호 34면

1940년대 말 성장한 세 딸과 함께한 쑹쯔원 부부. 김명호 제공

1971년 4월 쑹쯔원(宋子文)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부호가 사망했다며 유산이 3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예금을 한꺼번에 인출하면 월가의 금융시장이 40여 분간 마비된다고들 했다.
쑹쯔원의 부친은 성경을 쑤저우(蘇州) 방언으로 출판해 부를 축적한 선교사였다. 6남매를 모두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에 유학시켰다. 쑹도 하버드에서 학위를 마친 민국 정부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106> 쑹쯔원(宋子文)

쑹쯔원은 장(蔣介石), 쿵(孔祥熙), 천(陳果夫·陳立夫)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쑹(宋)씨 집안의 당주였다. 두 명의 누이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영화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송씨 3자매’가 바로 그들이다. 쿵샹시, 쑨원, 장제스가 모두 매부였다. 『붉은 논객』 천보다(陳伯達)는 이들을 청대 소설 홍루몽의 무대인 4개의 집안에 빗대어 ‘4대 가족(四大家族)’이라고 불렀다. 부정적인 의미였다. 천씨 형제는 “천하는 장(蔣)씨가 먹었고, 국민당은 천(陳)씨가 장악했다(蔣家天下陳家黨)”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국민당의 조직과 정보기관을 장악했던 장제스의 측근이었다.

쑹쯔원은 20세기 전반 부패한 관료자본의 상징이었다. 40년대부터 부자 소리를 들었다. 49년 중공정권 수립 후 샌프란시스코에 은거했다. 독서와 산책으로 소일했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은 “쑹이 43년 7000만 달러를 제너럴모터스(GM)와 듀폰에 투자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일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미국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도둑놈이다. 국민정부에 보내준 전시지원금 38억 달러 중 7억5000만 달러를 가로채 뉴욕과 브라질 상파울루의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말했다. 23년 누이 칭링(慶齡)의 소개로 쑨원의 영문비서로 출발해 26년간 중앙은행 총재와 재정부장·외교부장·행정원장을 거치며 중국의 전시재정을 집행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쑹쯔원이 세상을 떠나자 뉴욕 주 정부는 그의 재산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 상속세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결과 쑹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인에게 남긴 유산은 동산 100만 달러를 포함해 500만 달러가 채 안 됐다. 40년 그의 재산은 200만 달러였다. 집안이 원래 부자였다.

지난해 3월 팔순에 접어든 쑹쯔원의 맏딸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중국을 떠난 지 60년 만이었다.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 장기간 보관돼 있던 ‘쑹쯔원 비밀당안’을 외부에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산이 가장 관심을 끌었다.

쑹쯔원은 49년 이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매달 들어오는 이익금을 연필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매부들과의 관계가 복잡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매부에게 이용당하는 처남은 많아도 덕 보는 처남은 드물다”는 중국 속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장제스는 급할 때만 쑹쯔원을 등용했고 발등의 불이 꺼지면 못 본 체했다. 쑹은 실제로 네 차례 관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카이로 선언을 위해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도 외교부장인 쑹쯔원을 대동치 않았다.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의 자리를 넘볼까 봐 항상 긴장했다. 쑹이 암살을 모면한 것도 6차례였다. 제일 친한 친구가 장쉐량이었다.

쑹쯔원은 알려진 것처럼 직위를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다. 부패한 공직자로 매도당할 때 변명한 적이 없었고 평범한 생활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실천한 청렴한 공직자였다. 부인도 평범한 건축가의 딸이었다. 모든 게 평범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쑹쯔원의 흔적들을 복원시키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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