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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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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 요즘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이 교육은 엄마 몫이다.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체면과 위신상의 이유로 항상 뒷전이다. 그럼 엄마는 한가하고 채신머리 없어 아이들 교육을 전담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맞벌이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전업주부도 정말 바쁘다. 게다가 엄마들도 당연히 체면과 위신이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 교육은 늘 엄마 몫이다. 아이들 교육이라면 만사 제치고 최우선시하는 우리네 가정에서 정작 아버지가 교육에 관한 한 부재중이거나 열외라는 사실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 본래 교육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도 자식을 가르치기 위해 끊임없이 편지를 썼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보낸 수많은 편지들을 통해 힘써야 할 일과 삼가야 할 일 등을 소상히 적어 보냈다. 거기엔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평과 함께 자식들이 읽어야 할 책에 대한 지침까지, 그리고 닭치는 법, 각종 채소와 과일의 재배법, 제사상 차리는 법, 술 마시는 법 등 온갖 것이 시시콜콜할 정도로 담겨 있었다. 물론 호통과 질타도 있었다. 그 모두가 아버지의 몫이었다.

# 내 아버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 정확히 15년9개월을 살았다. 하지만 내 인생은 온통 아버지의 이야기와 그 기억들로 꽉 차 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암 판정을 받고 6개월밖에 못 사실 것 같던 아버지는 8년을 더 사셨다. 아니 버티셨다. 그 8년 동안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어김없이 아버지 방으로 건너가 오후 내내 함께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고 난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다. 때론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늘의 내가 만들어졌다.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그 8년 동안 계속된 ‘아버지의 시선’과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아버지는 내게 그 누구보다도 건강한 관심과 시선, 그리고 마음을 주셨다. 나는 한 아이가 자람에 있어 어머니의 ‘손길’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버지의 ‘눈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건강하고 활동적인 아버지의 관심과 시선은 으레 돈과 권력, 그리고 여자를 향할 뿐이다.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기껏해야 자투리 관심과 어쩌다 마주친 짧은 시선이 전부다. 잘나가는 아버지가 좋은 자식을 두기가 결코 쉽지 않은 패러독스는 바로 여기서 생기는 것인지 모른다.

# 아버지란 결코 돈 벌어다 주는 기계 혹은 누르면 물건 나오는 벤딩머신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엔 온통 ‘벤딩머신 아버지’뿐인 것처럼 착각될 정도다. 심지어 그런 기계 같은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자책감에 휩싸여 고개 숙인 아버지도 너무 많다. 하지만 본래 아버지는 시골마을의 정자 옆 느티나무 같은 존재여야 한다. 그늘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거기서 아이들이 쉬면서 뛰놀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게 아버지의 진짜 존재 이유다. 그런 아버지의 관심과 시선이 아이를 키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곧 우리의 미래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