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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열풍]휘청거리는 대학교육(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법대등 고시학과는 5년제입니다. 군 입대를 피해 고시공부를 계속하려고 최소 1년씩은 휴학하기 때문이죠. "

서울대 93학번 金모 (23) 씨는 법대 졸업을 한학기 남긴 지난해 2학기 휴학계를 내고 학교 부근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날로 거세지는 고시 열풍 속에서 이같은 '졸업 연기' 현상이 대학가에 일반화하고 있다.

93년 입학한 학생들의 졸업현황을 보면 정원 38명인 서울대 정치학과.외교학과는 올 2월 각각 4명과 6명만이 졸업했다.

서울대 독문과는 입학생 30명중 6명, 전기공학부는 2백70명중 1백37명만 졸업했다.

연세대도▶정치외교학과 1백명중 13명▶경제학과 1백90명중 19명▶행정학과 1백명중 20명▶법학과 1백60명중 24명▶불문과 45명중 13명▶사회복지학과 40명중 15명만이 졸업장을 받았다.

장달중 (張達重) 서울대 기획실장은 "올해 졸업하지 않은 학생중엔 군 입대등 개인 사정으로 휴학한 학생도 있지만 상당수는 고시 준비를 위해 휴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 말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조건 고시에 응시하겠다는 학생이 많아 이같은 현상은 더욱 확산될 전망.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5월 전국 21개 대학의 인문사회.자연.예체능 계열 신입생 1천5백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사법.기술등 각종 고시를 준비하겠다는 학생이 13.2%로 대학원 진학 (14.3%) 다음으로 많았다.

고시열풍의 근본 원인은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고시병과 관료 선호 풍토에 최근의 경제난까지 겹쳤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법시험 선발 인원이 95년까지 3백명이었다가 지난해 5백명, 올해 6백명으로 늘고 2000년까지 매년 1백명씩 증가하는데다 교육개혁으로 전공 부담이 줄어든 것도 비 (非) 법대생이 고시에 몰리는 이유가 되고 있다.

조혜정 (趙惠貞)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험에 합격만 하면 수입.명예.권력을 모두 손에 쥐는 것이 고시의 속성" 이라며 "명예퇴직 확산등으로 학생들이 실직 걱정이 거의 없는 고시에 몰린다" 고 말했다.

서울대생 李모 (22.법대4) 씨는 "동기생 가운데 고시 이외의 다른 길을 생각하는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고 말했다.

제대후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 준비중인 연세대생 韓모 (26.법대4) 씨는 "이제는 나이 때문에 취직도 어려워 계속 고시에 매달릴 계획" 이라고 말했고 연세대생 崔모 (25.신방3) 씨는 "최근 고용환경을 감안하면 학생들이 고시에 몰리는 것을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다" 고 주장했다.

특히 서울대생 黃모 (20.사회교육2) 씨는 "전공은 필수과목만 듣고 선택과목 대부분은 법대 과목을 들으면 고시공부와 학점관리를 동시에 할 수 있다" 고 비결을 털어놓았다.

연세대.고려대.한양대.서강대.경희대.동국대.건국대등 웬만한 중상위권 대학들 대부분이 수백명 규모의 교내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고시합격을 독려하는 것도 고시 열기를 더욱 뜨겁게 하고 있다.

고려대 법대.경영대.정경대등의 고시반에는 총 1천90여명이 있다.

고려대는 고시반 학생에겐 특강.모의고사 실시.장학금 지급등의 혜택을 주고 최종 합격자에게는 졸업때까지 등록금을 면제해준다.

성균관대는 고시반에 3백명을 수용하고 연간 1억5천여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동국대생 韓모 (25.토목공학3) 씨는 "고시철마다 내걸리는 합격자 플래카드를 보거나 고시 합격자에 대한 장학금 지원소식을 들을 때마다 고시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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