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보다 낫다고 하지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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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지난해 9월 15일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6개월이 넘었다. 위태롭던 금융시장은 몇 차례 위기를 넘긴 뒤 안정을 찾는 모습이다. 그래도 체감 경기는 11년 전 외환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는 호소가 많다.

실제로 2월 일자리는 14만2000개 줄었다. 실업자는 92만 명, 실업률은 3.9%에 달해 ‘100만 명 실업자’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고용시장 상황은 외환위기 직후가 더 끔찍했다. 외환위기 6개월 뒤인 1998년 5월 일자리는 129만5000개가 사라졌다. 실업자는 151만 명, 실업률은 6.9%까지 치솟았다.

당시가 더 심각했던 것은 외환위기 직후 초고금리가 닥치면서 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진 데다 부실 기업을 솎아 내는 강제 퇴출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그때 같은 살벌한 구조조정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 민간에서 해고를 자제하고 일자리를 나누는 잡셰어링이 확산되고 있는 것도 고용 대란을 막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다. 당시는 경기 내리막이 가팔랐던 만큼 반등도 빨랐다. 98년 8월에 경기는 바닥을 찍고 상승하기 시작했다. 99년 1월엔 광공업 생산이 16.5% 증가할 만큼 살아났다. 98년 -6.9%로 추락했던 성장률이 99년엔 9.5%를 기록했다. ‘V자’형 회복이었다. 돌이켜 보면 외환위기 후 6개월째인 98년 5월은 경기가 한창 바닥으로 치닫던 때였다.

이번 경우도 3월 현재 경기가 바닥 부근에 와 있다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다. 1분기 또는 2분기가 바닥이라는 것이다. 현오석 신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25일 “한국 경제는 지금 바닥을 다지는 단계”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기가 언제쯤 회복될지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하다. 현 원장은 “‘L’자형보다 ‘V’자형이나 ‘U’자형의 경기 그래프를 그릴 것”이라며 “지표상으로는 올 하반기부터 상승 시도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U자형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그는 ‘V’자형 회복이 가능하려면 수출이 확 늘어나면서 경제를 이끌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한 포럼에서 “향후 경제 회복 과정은 외환위기 때에 비해 길고 더딜 것”이라고 말했다. ‘U’자형 회복에 무게를 싣는 표현이다. 사실 우리 경제의 안팎 여건은 외환위기 때와 정반대다. 그때 우리 내부엔 기업·금융 부실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세계경제는 괜찮았다. 부실을 털어 내자 수출이 늘어나면서 금세 활력을 되찾았다. 반면 지금은 바깥이 문제다. 내부적으로 우리 기업들의 역량은 여전하지만 수출시장인 세계경제가 불황에 빠져 있다. 기대할 만한 대목도 있다.

정부가 재정을 총동원하다시피 한 수퍼 추경이 효과를 거둔다면 경기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이럴 때 불합리한 노사 관계 개선이나 규제 완화 같은 해묵은 과제들을 해결하면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 높아져 안정적인 성장이 가능해진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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