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일본 온천 명소 닛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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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틀버스 운전석에서 투숙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미오 다모쓰 사장.

도쿄(東京)에서 열차로 약 두시간 거리의 닛코(日光)-. 이곳은 연간 330만명의 온천객이 묵는 일본 굴지의 온천 관광지다. 닛코 시내 60여곳, 그리고 시내에서 30km 떨어진 기누가와(鬼怒川)온천 지역의 80여곳 등 총 150개가량의 이 일대 온천은 요즘 초긴장 상태다. 지난해 11월 이 지역 유통자금의 70~80%를 떠안는 돈줄, 아시카가(足利)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이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이 지역 온천가의 재생을 위해 최근 국가기관인 산업재생기구가 나서고 있지만 앞으로 선정할 지원 대상은 20~30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다수 온천여관과 호텔들이 재생기구에 '러블 콜'을 보내고 있지만 선정 대상에서 제외될 대다수 업체는 최악의 경우 문을 닫는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JR 닛코역. 한 70대 노인이 정문 개찰구를 나온 고객들에게 "온천호텔 시키사이(四季彩)'에 오신 분들은 이 버스에 타주세요"라며 나긋이 이야기를 건넸다. 손님을 호텔로 실어나르고, 투숙객을 다시 역으로 안내하는 이 버스의 운전사 가미오 다모쓰(神尾保.71). 그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 호텔의 사장이었다. 하지만 빚은 갈수록 쌓여가고 추가 융자마저 끊기자 30여명인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산업재생기구가 제시한 100% 감자안을 받아들였다. 경영권을 산업재생기구로 넘긴 것이다. 10여억원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조건이었다.

졸지에 사장과 주주 자격, 자산을 모두 잃게 된 가미오는 "그래도 국가가 오랫동안 키워온 온천호텔을 재건해준다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며 버스 운전사를 자원했다. 그뿐 아니다. 17년간 온천호텔에서 '오카미(女將.여성 총지배인)'를 맡아 온 부인(64)은 매점 담당 평직원으로 변신했다. 가미오는 "내 호텔을 넘기는 것인데 저항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며 "하지만 국가가 부채를 탕감해주고 지원까지 해준다는데 내가 어찌 가만 있을 수 있느냐"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 사장님이란 호칭을 버리지 않는 종업원들에게는 엄하게 주의를 준다.

닛코 온천가의 위기는 아시카가은행의 파산 외에도 장기 불황으로 인한 디플레로 숙박 단가가 10년 전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주요 원인이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산업재생기구의 구상은 온천지 재생펀드를 만들어 닛코 일대 온천지를 공동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즉 재정난을 겪고 있지만 다시 고객을 끌어들여 흑자를 남길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온천 여관.호텔들을 하나로 묶어 이를 산업재생기구가 설립하는 온천 업무 지원회사가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 3~4대, 길게는 10대 넘게 가업(家業)으로 온천여관을 운영해 온 이들의 고민은 깊다. 운좋게 산업재생기구의 지원 대상에 들어가도 경영권을 빼앗기게 되는 만큼 "조상을 뵐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는 이 지역 한 온천여관 주인은 "조상에게 몹쓸 짓을 할 수 없다"며 "경영권을 안 넘기고 지원받을 수 있는 민사 재생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과연 그게 쉽게 될는지…"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닛코=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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