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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침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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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4·29 재선거에 나서는 한 인사의 말이다. ‘그분’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가리킨다. 그의 다음 말은 이랬다. “현 시점에서 박 전 대표를 위하는 길은 선거에 이겨서 국회의원이 되는 거다. 반드시 이겨서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을 증명해 보이겠다.”

국회의원 출사표치곤 좀 묘하다. 유력 정치인과의 친분을 내세우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생의 인연까지 거론하는 건 좀처럼 못 봤다. 출마자들은 보통 “국민을 위하겠다”고 내세운다. 적어도 공개적으론 그렇다. 그는 박 전 대표를 앞세웠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속한 정당을 택하진 않았다. 당선된 뒤 입당하겠다는 거다.

제대로 된 정당정치 체제라면 정당의 대표선수가 유권자의 심판대에 오른다. 그게 책임정치다. 한나라당 후보와 장차 한나라당 사람이 될 후보가 경쟁토록 하는 건 정당의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주된 차이가 특정인과의 친소(親疏)인 점도 문제다. 한나라당이 정당이라기보다 개인적 관계가 중시되는 도당(徒黨)에 가깝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니 말이다.

박 전 대표는 정작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정치를 바로잡겠다.” 1998년 정계에 입문한 그의 일성이다. 실제 정치개혁은 그간 그의 과업이었다. 그는 특정인의 이해가 과도하게 반영되는 정당 체제를 비판해 왔다.

공천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지방선거를 앞둔 2006년 당 대표였던 그는 사실상 공천권을 포기했다. 기초단체장 공천을 시·도당에 맡겼다.

원칙이 흔들리고 절차가 무시된다고 여겼을 때는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총재에게 “공천 결과가 총재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얘기가 많다”고 했던 그다.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 공천’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했을 때 역시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분노했다. 결과적으로 국민은 박 전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재선거도 지난해 총선과 유사한 구도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실상 공천 경쟁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와 가깝다는 후보가 우회로를 택했기 때문이다. 공천이란 예선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선에서 뛰기로 결정했다. ‘박근혜’란 깃발만 들어도 승산이 높다고 판단한 때문인 듯하다.

실제 이런 셈법이 현실적으로 보일 만큼 박 전 대표는 막강하다. 한 당직자가 “사석에서도 ‘박’ 또는 ‘박 대표’라고 하지 ‘박근혜’라곤 못하겠다. 무섭다”고 토로할 정도니 말이다. 권력의 속성상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그에 비례해 그와 가까운 인사들은 우회로를 택하고 싶은 유혹을 더 받을 거다. 본선만 치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테니 말이다.

그는 이번에 침묵한다고 한다. 지난해 그의 소극적인 태도는 당 밖의 친박 후보에 대한 지지로 해석됐다. 이번엔 어떤 의미일까. 혹 다음엔 어떨까. 그가 강조해 온 원칙과 절차에도 우회로가 있는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고정애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