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통계 착시에 홀려 위기의 허리띠 풀면 큰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호전된 경제지표가 쏟아지고 있다. 국내에선 3월 무역흑자가 사상 최대인 40억 달러에 이를 것이란 소식이다. 이런 청신호에 외환시장은 급속히 안정을 되찾는 조짐이다. 경제위기 진원지인 미국에서도 반가운 뉴스가 전해졌다. 소비자 기대지수와 경기선행지수가 연거푸 상승하는 중이다. 최악의 국면을 지났다는 기대감과 함께 ‘경기바닥론’이 솔솔 퍼지고 있다. 이에 힘입어 뉴욕 증시는 지난주부터 힘차게 반등하고 있다.

일부 경제지표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통계 착시현상을 감안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은 무리다. 예를 들어 지난달부터 기대 이상의 무역흑자가 쌓이는 배경에는 환율 효과가 숨어 있다. 지난 1년간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50% 이상 떨어졌다. 수출이 늘고 수입은 주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다 지난해 상반기 매달 75억 달러에 달했던 원유수입액이 올해는 37억 달러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원유수입액 감소분만 따져도 매달 앉아서 38억 달러의 무역수지가 개선되는 셈이다. LG전자 남용 부회장은 최근 “우리가 고(高)환율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고 경고했다. 귀담아들어야 할 대목이다.

미국 경제도 아직 바닥을 가늠하기에는 때 이른 느낌이다. 미국의 신규 실업수당 청구건수는 6주 연속 6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2월의 주택 차압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30%나 늘어났다. 고용과 부동산이라는 미국의 양대 시장에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는 것이다. 고용시장이 안정되지 않으면 본격적인 소비회복은 어렵다. 집값 하락이 멈추지 않는 한 부실 부동산 담보 대출에서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도 진정될 수 없다. 외환위기 당시 우리도 천문학적 공적 자금이 투입된 뒤 일시적인 반등이 나타나는 신기루를 경험한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지금은 양 극단론을 모두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비관론자들은 한국 경제의 약점을 터무니없이 부풀리면서 위기론을 펼치고 있다. 이런 저주의 주문에 홀리면 ‘자기실현적 위기(self-fulfilling crisis)’를 자초할 수 있다. 거꾸로 섣부른 낙관론도 금물이다. 일부 경제지표에서 경제의 추락속도가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반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생산·소비·고용·투자 등 실물경제 지표에서 바닥을 확인한 뒤에 대응에 나서도 늦지 않다. 통계 착시현상이 뒤섞인 경제지표를 무턱대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위기의식마저 엷어진다면 더욱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