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CoverStory] 어디로 숨었나, 피맛골 그 맛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조선시대, 대로변을 질주하는 양반님네들의 말과 마차를 피해 서민들이 걸어다니던 뒷골목. 이곳은 어느새 서민을 위한 먹자골목이 되었고, 일제시대를 거쳐 20세기 말까지도 주머니 가벼운 서민의 허기와 치기를 달래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돼줬다. 해장국골목·낙지골목·주점골목 등 골목마다 서민 먹거리를 앞세운 식당들이 북적거렸고,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뒷사람과 등을 비비며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로 골목은 불야성을 이뤘다.


이 골목이 금세기 들어 시작된 재개발로 허리가 뭉텅 잘렸고, 아직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길도 이젠 재개발 순서를 기다리는 신세다. 주점과 맛집들은 대부분 간판을 내렸고, 밤이 되면 을씨년스러운 적막감이 허리가 끊긴 골목길을 따라 흐른다. 아직 문을 열고 있는 식당도 활기가 떨어진 건 매한가지다.

30년째 이 골목에서 생선을 구워 팔고 있는 대림식당 주인 석송자(66)씨는 “연기 때문에 처음부터 길에서 생선을 구워 왔는데, 한때는 사람에 치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많던 가게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사람의 발길도 많이 끊겼네요”라고 말했다.

맛집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소설가·시인·화가·언론인 등의 아지트로 인기를 누렸던 시인통신, 주당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던 부산뽈데기 등 적잖은 터줏대감들이 피맛골을 완전히 떠났다. 부산복집·함흥집·남도식당·대성양곱창·삼성집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맛집들도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맛집이 피맛골 주변을 기웃거리며 이 부근 어디론가 스며들어 가고 있다. 더러는 최근 피맛골 허리 부분에 완공한 오피스텔 빌딩으로 스며들었다. 또 더러는 종로·북창동·사직동 등 길 건너 저편으로 새 둥지를 찾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재개발로 어수선한 피맛골 안에 아직 화덕에 불을 끄지 않은 대폿집도 있다. 건물이 팔리지 않아 고집스레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잊지 않고 찾는 단골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교보빌딩 뒤에 남은 작은 주점들의 불이 꺼지면 피맛골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이 골목을 그리워하게 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여기저기 흩어져 꼭꼭 숨어버린 피맛골의 맛집들을 술래잡기 하듯 찾아내 옛 정취를 한번 달래보는 정도인지 모른다.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그리움 때문일까, 그리 멀리 못 갔네

지금 피맛골 일대는 썰렁하다. 밤을 환히 밝히던 맛집과 주점은 몇몇 곳만 남았을 뿐 모두 떠났다. 그래도 수십 년을 한결같은 맛으로 피맛골을 지켰던 터줏대감 중 일부는 이곳저곳에 새 둥지를 틀었다. 이들 피맛골 터줏대감을 찾으러 나섰다. 수소문을 거듭해 소재를 찾아낸 20여 곳이 여기에 있다.

지키고

피맛골을 떠나지 못한 맛집 상당수가 이곳 재개발 1호인 르 메이에르 빌딩에 입주했다. 예전보다 3~4배 비싼 임대료 때문에 고전 중이라는 게 맛집 주인들의 한결같은 고민이었다. 가격을 많이 올려야 할 터이지만 요즘 나빠진 경제사정을 알기에 눈치만 보고 있는 중이란다.

청진옥 1937년부터 72년째 선지해장국을 끓여내는 피맛골의 터줏대감이다. 지난해 8월 빌딩 안으로 이사 와 현대식 건물 안에서 새 출발을 했다. 뚝배기에 밥을 넣고 그 위에 해장국을 부어 내놓는 국밥 메뉴를 없앴다. 밥과 국을 따로 내놓는 ‘따로국밥’이 주 메뉴를 대신하고 있다. 가격은 500원 올려 6000원을 받는다. 02-735-1960.

미진 54년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에서 시작한 메밀국수 전문점. 점심시간마다 ‘줄 서는 집’으로 유명했다. 냉·온 메밀을 비롯해 낙지볶음·보쌈 등 12가지 메뉴가 있다. 올 초 8년 만에 메밀국수 가격을 1000원 올렸다. 6000원. 02-732-1954.

서린낙지 59년 문을 연 이 집은 70년대 중반 청진동으로 옮겼다가 2월 중순 현재 건물 2층에 자리 잡았다. 불판에 베이컨·소시지·콩나물 등을 올린 다음 낙지볶음을 더해 조리하는 ‘베이컨 소시지’가 주 메뉴다. 1만5000원. 낙지볶음(1만4000원)은 추가해야 한다. 02-735-0670.

이강순실비집 주인 이강순(71)씨가 93년 낙지볶음의 원조 박무순 할머니의 실비집을 인수, 98년 지금의 이름으로 상표 등록을 했다. 주 메뉴는 낙지볶음. 1만6000원. 낙지볶음을 포함해 조개탕(1만원)·감자탕(1만원)·파전(8000원) 등 주요 메뉴 가격은 8개월째 같은 수준이다. 02-732-7889.

장원집 40년 전통의 족발집이다. 교보빌딩 뒤에서 장사하다 1월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 건물에 세를 들었음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지금도 족발 큰 것이 3만2000원, 빈대떡이 1만원이다. 제육덮밥·닭도리탕(6000원), 순대국(5000원) 등 점심 메뉴를 개발했다. 02-734-7230.

제주도복집  85년 종로구청 건너편에서 시작한 맛집. 복지리·복매운탕이 주 메뉴다. 2만3000원. 최근 1000원을 올린 가격이다. 02-733-4250.

감촌순두부 30년 동안 종로구청 앞 먹자거리의 대명사처럼 통했던 곳이다. 빌딩 2층 서쪽에 들어서 있는데, 제법 규모가 크다. 주 메뉴인 순두부찌개는 1000원 올랐다. 9000원.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다. 02-733-7035.

운정 64년 불고기 전문 식당으로 출발, 45년째 같은 메뉴를 내놓는다. 이사 전과 같은 가격인 1만2000원. 등심·갈빗살·차돌박이 등 구이류도 판다. 2월 빌딩 2층으로 이전했다. 대신 점심 메뉴인 육개장 등을 1000원 올렸다. 6000원. 02-732-9251.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옮기고 

피맛골을 떠났다. 대부분 올라 버린 임대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옮겨간 곳에서 가격은 예전 피맛골에서 받던 수준을 고수하는 가게가 많다.

청진식당 88년 교보빌딩 뒤 피맛골 샛길에서 돼지불고기와 오징어를 세트로 불판에 얹어 팔기 시작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으로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1월 서울YMCA 옆으로 이전했다. 가격은 돼지불고기와 오징어가 각각 6000원으로 변동이 없다. 두 명 이상 가야 두 가지 맛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다. 02-732-8038.

신승관 63년 제일은행 옆에서 화교가 개업한 중국 식당으로 3대째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9월 서울 북창동의 소공동우체국 뒤로 이전했다. 자장면이 대표 메뉴다. 옮기면서 가격을 500원 올렸다. 4000원. 02-735-9955.

안성또순이집 35년째 생태찌개를 전문으로 내놓고 있다. 정동에서 출발, 80년대 중반 청진동으로 옮겼다가 2007년 말 서울역사박물관 옆 사직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가격은 4만원(4인 기준)으로 같다. 02-733-5830.

한일관 39년 화선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3대를 이어온 불고기 전문점이다. 올 1월 70년 만에 성수대교 남단 호산병원 뒤로 이전했다. 불고기 1인분에 2만5000원으로 2000원 올렸다. 02-732-3735.

삼성집 점심에는 생선구이와 각종 찌개류, 저녁에는 돼지족발·빈대떡·파전·모둠전 등을 팔며 피맛골 종합 음식점 구실을 하던 곳이다. 하지만 지난달 인사동의 칠갑산이란 식당을 인수하면서 업종을 바꿨다. 02-735-2609.



망설이고 

썰렁해진 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들이다. 일부는 세들어 있는 건물이 팔리지 않았고, 일부는 아직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여전히 썰렁해진 골목에서 문을 열고 장사를 한다.

열차집 대표적인 피맛골 터줏대감 격인 막걸리집. 황학천이 복개되기 전인 59년 천변에 나무 의자를 늘어놓고 시작했다. 6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우제은(68)씨가 77년부터 32년째 뒤를 잇고 있다. 메뉴는 한결같이 빈대떡에 막걸리다. 간을 하지 않은 빈대떡에 굴젓을 곁들여 먹는 맛이 일품이다. 빈대떡(9000원) 등 메뉴는 10년째 같은 가격이다. 02-734-2849.

대림식당 삼치·굴비·꽁치 등을 구워 파는 생선구이 전문 식당. 30년째 쉬는 날이 없다. 가격도 모든 메뉴가 6000원, 10년 전 그대로다. 아직 이전 계획이 없다. 02-739-0829.

원조 할머니 낙지쎈타 낙지볶음의 원조 박무순(92) 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다. 무교동 낙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실비집을 접었다가 7년 만인 2000년 둘째 아들 이중택(62)씨와 다시 시작했다. 낙지를 볶을 때 고춧가루·마늘·생강 등 처음에 사용했던 재료만을 고집해 45년째 맛이 한결같다. 메뉴는 낙지볶음(1만6000원)·조개탕(1만원)·감자탕(9000원)·파전(8000원) 등이다. 02-734-1226.

와사등 인사동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85년 10개였던 테이블이 지금 40여 개에 이른다. 영화 ‘오 수정’에서 문성근과 이은주가 술 먹는 장면을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벽에는 손님들의 낙서가 빼곡해 목로주점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막걸리와 고갈비(이면수구이)가 1만3000원. 02-723-9046.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죽을 때까지 손에서 낙지 안 놓을 거야”

낙지볶음의 살아있는 전설, 92세 박무순 할머니

 “그땐 매운 양념에 버무린 낙지는 상상도 못했지.”

박무순(92·사진) 할머니는 소위 ‘무교동 낙지’로 불리는 낙지볶음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무교동 낙지를 탄생시켰고, 가장 대중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원조’라고 주장하는 집이 많지만 박 할머니 앞에만 서면 이내 꼬리를 내린다. 대부분 그에게서 손맛을 배우거나 모방했던 탓이다.

무교동 낙지는 1965년 탄생했다. 장소는 서울 서린동 한국수출보험공사 자리다. 한 대폿집을 인수한 박 할머니가 내놓은 신메뉴가 낙지볶음이다. “낙지가 쌌고, 흔했던 시절이야. 그런데 이를 당시엔 데치거나 국 끓여 먹는 게 전부였지. 그래서 평소 집에 온 손님에게 술안주로 내놨던 것을 선보이기로 했지.”

박 할머니는 상호를 실비집으로 바꿨다. 메뉴는 매콤한 낙지볶음과 이에 어울리는 담백한 조개탕, 그리고 감자탕과 파전이 전부였다. 손님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대박이 터진 것이다. 낙지볶음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주전자가 전부였던 시절이었지만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얼마 안 돼 유정·미정 등 유명한 낙지집이 생겨났다. 서린동 일대에 열 곳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밀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박 할머니는 인근에 낙지센타(72년)를 열었다. 소위 분점이었다.

무교동에도 낙지골목이 형성됐다. 당시 손님 대부분은 무교동 오피스타운의 넥타이부대였고, 이들이 서린동과 무교동의 낙지볶음을 ‘무교동 낙지’라 부르면서, 이것이 지금까지 고유명사처럼 이어져오고 있다.

70년대 중반 서린동이 재개발되면서 박 할머니는 청진동으로 옮겨 실비집만 운영했다. 그러다 93년 큰아들을 따라 미국으로 가면서 가게를 이강순(71) 할머니에게 넘겼다가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 이중택(62)씨와 함께 청진동에 ‘원조할머니 낙지센타’를 다시 열었다.

박 할머니의 낙지볶음은 세월이 흘러도 맛이 한결같다. 몇 백원 하던 낙지볶음이 1만6000원, 주전자에 담아 냈던 막걸리가 소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구순의 박 할머니는 예전에 비하면 거동은 많이 불편해 카운터에 앉아 손님을 맞는 일을 주로 하지만 매일 음식 상태를 점검하는 건 잊지 않는다.

“낙지는 국산이 거의 나지 않는 탓에 중국산을 쓰지. 중국 칭다오에서 큰아들이 최상의 낙지만을 구매해 냉동 상태로 보내주고 있어. 조리법도 마찬가지야. 청양고추와 일반고추를 반반 섞은 고춧가루에 마늘·생강, 설탕 조금 넣는 것뿐이야. 아무리 바빠도 미리 볶아놓는 것도 없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지금도 주 메뉴는 낙지볶음과 조개탕(1만원)·감자탕(1만원)·파전(8000원) 등 45년 전 그대로다. 박 할머니는 요즘도 하루에 낙지를 한 접시씩 먹을 만큼 왕성한 식욕을 자랑한다.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가 가장 보람 있지. 죽을 때까지 낙지를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여전히 그 자리에 … 열차집·와사등

 피맛골의 초입(교보빌딩 뒤)과 끝자락(인사동 입구)에 있는 이 골목의 대표적인 막걸리 집인 열차집과 와사등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한때 피맛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이었던 막걸리를 파는 주점이었던 까닭에 이 두 집은 피맛골의 대표적인 터줏대감으로 인정받았다.

또 이 두 주점은 단골손님이 이름을 지어 붙여줬다는 공통점도 있다. 1969년 문을 연 열차집은 황학천이 복개되기 전엔 길가에 작은 나무의자와 테이블을 줄이어 놓고 빈대떡과 막걸리를 팔았다. 70년대 이 집을 인수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주인인 우제은(68·左)씨는 “손님이 많을 땐 등을 맞대고 앉아 술잔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모습이 열차 내부를 연상시킨다 해서 한 손님이 ‘열차집’이라 부른 게 이름이 된 거죠”라고 설명한다. 개천 복개 후 바로 근처로 장소는 옮겼지만 분위기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단다. 또 빈대떡 맛도 변치 않았다. 간을 하지 않은 녹두반죽을 돼지기름에 부친 빈대떡(9000원)은 함께 내놓는 어리굴젓과 곁들여 먹으면 막걸리 안주로 최고다.

와사등은 85년 김애자(69·右)씨가 10개의 테이블로 시작한 주점이다. 지금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10년 남짓하다. 종로집으로 허가를 받았지만 간판을 내걸지 않았다. 대신 주점 옆에 전봇대가 있어 전봇대집 또는 봇대집으로 불렸다. 그런데 10여 년 전 한 손님이 ‘와사등’이라 쓰인 간판을 갖고 나타났다. 분위기가 김광균의 시 ‘와사등’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설명을 해줬단다. 40여 개로 테이블이 늘었지만 여전히 간판은 없다. 김씨는 “간판은 달아 뭐해요. 손님들이 그렇게 알아주면 그뿐이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분위기는 영락없이 80년대 선술집이다. 판자로 얼기설기 덧대 붙인 듯한 낮은 천장과 벽에는 온통 낙서투성이다. 찌그러진 세숫대야 모양의 큰 양은그릇에 담아내는 막걸리, 불판에 구워낸 고갈비(이면수구이·9000원)도 변함없다.

하지만 언제 이곳에서 물러나야 할지 주인들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건물이 팔리면 3개월 후엔 나가야 한다는 것. 올 연말까지 갈 것 같다고는 하지만 누구도 장담 못한다.

글=박상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week&CoverStory] 피맛골 옛날엔 … 딱 한잔만~ 600년 서민 쉼터

 조선시대, 서민들은 양반들을 실어 나르던 교자와 가마를 보면 무조건 엎드려 예를 표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하던 일이 지체되거나 하급 관료들이 출근 시간을 놓치는 등 폐단이 많았다. 특히 종로통이 그랬다. 이 같은 불편을 덜기 위해 서민들이 양반을 만나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대로를 따라 좁은 길을 만들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흥인문까지 종로를 따라 양쪽으로 생긴 좁은 골목이 바로 피맛길이다.

당시 길의 폭은 3.43m(11척)였다. 이는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공전편’의 도로 정비 규정에 따른 것이다. 태종 15년(1415년) 도로를 정비하면서 대로는 폭 17.48m(56척), 중로는 5m(16척), 소로는 3.42m(11척)로 정했다. 피맛길은 그런 작은 길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피맛길에 서민이 많이 다니다 보니 목로주점·모주집·장국밥집 등이 자연스럽게 들어섰고, 이게 20세기 말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다 이젠 도심 재개발을 맞아 약 600년 만에 사라지게 된 것.

현재 남은 피맛길은 종로를 기준으로 북쪽으론 교보빌딩 뒤에서 제일은행 본점 사이, 서울YMCA에서 인사동 입구 사이, 탑골공원에서 단성사 사이 등이다. 남쪽에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중 북쪽 피맛길은 2002년 종로구의 새 주소 부여 사업 시행에 따라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단성사까지를 동피맛길, 서울YMCA까지를 서피맛길, 그리고 제일은행 본점에서 교보빌딩까지를 피맛길로 나눠 부르고 있다. 흔히 피맛골이라 부르는 구간은 교보빌딩에서 인사동 입구 사이다.

박상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