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개천절 보도 이대로 좋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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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의 국경일 (國慶日) 가운데 가장 으뜸은 개천절 (開天節) 이고, 그 다음은 한글날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우리에게서 조상 (祖上) 과 한글을 없애버린다면 이 지구상 (地球上)에서 배달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우리나라 언론매체나 정부의 태도를 보면 그야말로 실망스런 구석이 여러모로 엿보인다.

가령 정부가 한글날을 공휴일 (公休日)에서 제외시킨 것이라든지, 개천절 행사의 대통령 주재가 슬그머니 사라지면서 형식적인 것으로 격하 (格下) 돼 버린 것등은 그 일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정부의 태도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된 역사의식이라든지, 정치적 판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비판하는 것이 당연한 언론의 몫인데 그것을 소홀히 했다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할 밖에 없다.

언론이 정부의 태도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나아가 뒷북치는 보도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이란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유수한 신문들의 개천절 관련 보도를 보면 형식화된 정부행사마저 제대로 기사화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물론 여러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지만 나는 가장 큰 요인으로 두가지를 꼽고 있다.

하나는 정부의 행사 격하 내지 형식화가 기사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촉매구실을 했고 그에 따른 결과가 행사기사의 묵살 또는 축소보도로 귀결됐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일부 언론의 역사관 내지 가치판단 문제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른바 식민사관 (植民史觀)에 영향받은 지난날의 잘못된 교육 탓이라고 지적될 수도 있는데, 언론이 오늘의 시대상황을 판단하고 이끌어 가는데 있어 어떤 역사의식을 갖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스럽게 반증 (反證) 해 주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른바 역사의식및 역사의 기록과 관련해선 일찍이 김동인 (金東仁) 이 '조선사온고 (朝鮮史溫古)' 에 매우 흥미 있는 글을 남긴 바 있다.

역사소설을 쓰기 위해 역사책을 뒤적이면서 느낀 소감을 쓴 동인의 글은 오늘날의 지식인이나 언론인에게 하는 고언 (苦言)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중국에서 나온 '한적 (漢籍)' 을 보면 '한적'에는 지나인 (支那人)의 존대심 (尊大心) 때문에 우리를 내리 깎은 기록 투성이고, 일본에서 나온 '왜적 (倭籍)' 을 보면 이 또한 무호동중 (無虎洞中) 의 삵 모양으로 자기만을 치켜세운 기록으로 가득하고, 우리의 '한적 (韓籍)' 을 보면 제 조국 (祖國) 보다 지나 (支那) 를 더 추앙하는 곡필 (曲筆) 의 기록이 너무나 많다고 하면서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특히 동인은 고대사에 있어 일본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 역사왜곡 (歷史歪曲) 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것은 우리의 국조 (國祖) 인 단군 (檀君) 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근본부터 틀리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지식인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이런 견해는 오늘날 일컬어지고 있는 '역사 바로잡기' 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나아가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은 결코 정략적 (政略的) 인 것이 돼선 안된다는 것을 새삼스럼게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같다.

우리나라 고대사의 재조명과 관련해 중앙일보는 매우 주목되는 기사를 보도 (5월10일자) 한 바 있다.

올해 개천절을 앞두고 9월25일부터 10월3일까지 중국 베이징 (北京)에서 남북한과 중국의 세나라 학자들이 모여 '단군고적학술토론회' 가 열리게 됐다는 예고기사가 그것이다.

특집으로 꾸민 이 기사는 중국측 주최자라는 진천바오 (金振寶) 의 인터뷰를 통해 매우 강한 메시지를 남겨 주었고, 그것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늘님으로 대표되는 단군조선이 실상 동양의 천국이었다.

중국인의 시조신인 황제 (黃帝) 는 이 천국의 부족장이었다" 는 진천바오의 주장과 '중국인의 뿌리를 단군에서 찾는다면…단군사상은 한국이 아니라 동방정신의 정화인지 모른다' 는 말들은 사실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말과 주장들이 세나라 학자들이 모인 국제세미나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는 커다란 관심거리고, 그것은 뉴스가치로서도 굉장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개천절이 지나도록 국제세미나가 어떻게 됐는지 중앙일보엔 한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고 있다.

이 세미나가 열렸는데도 그것을 보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처럼 엄청난 문제도 없으며, 그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밖에 없다.

만약 세미나가 열리지 않았다면 예고기사로, 그것도 특집으로 보도한 것인만큼 그동안의 경과를 보도하는 것이 정도 (正道) 일 터이다.

기사, 특히 예고기사의 경우 취재와 보도의 책임이 이른바 사건기사에 못지 않다는 인식이 절실하다는 것을 강조해 두고 싶다.

베이징 세미나의 궁금증은 접어두더라도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단군신화의 재조명' 이란 주제의 국제세미나도 관심거리였다.

단국대 주최의 이 세미나에는 한.중.일 세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러시아 학자도 참가함으로써 우리 고대사와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일컬어진다.

중앙일보는 이것마저 너무나 소홀히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규행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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