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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투표나 기권이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 세상 만물은 궁극적인 것 뿐만 아니라 하찮은 것까지 모두 스스로를 드러냄이 참으로 분명하거늘…. "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소설 '장미의 이름' 에서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가 젊은 제자에게 한 말이다.

한국경제가 스스로를 드러냄 : 한보.삼미.대농.진로.기아, 그리고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9천1백50개의 부도.도산 중소기업들, 매년 2백억달러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 10조~20조원에 달한다는 은행 부실 채권, 그런데 정치권은 이것을 보지 못하거나 숫제 보려고도 않는 것같다.

지금 세계 선진국의 국가원수들은 모두 경제의 승패에다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있다.

이것은 탈냉전 이후 글로벌 경제 시대로의 예견된 변화에 대한 사전적 (事前的) 적응이다.

상품과 서비스의 대외 세일즈맨 총리가 되기도 하고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더 싸게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과학기술 향상을 위한 프로젝트 담당자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하버드대 R 하이피츠 교수는 이런 적응적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 지도자는 다음 여섯가지 특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현실을 한눈에 조망할 만큼 넓은 시야를 가질 것 둘째, 적응적 도전의 실체를 파악할 것 셋째, 고충을 제어할 수 있을 것 넷째,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일 것 다섯째, 업무를 아래로 되돌릴 것 여섯째, 아래로부터의 의견을 존중할 것. 한국경제에 대한 조망능력이라면 고도성장의 종언을 사후적으로나마 알아듣는 것이다.

잉여 노동력이 고갈된 다음 생산기술 모방에 의해 지속해 온 노동생산성의 증가도 90년대 전반으로 끝났다.

이런 환경에서 고도성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임금의 무한정 상승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노동수요 유발을 억제하려고 자동화에 투자하면 그 결과 생산효율이 세계 시장과의 경쟁에서 이길 만큼 향상되지 않는 한 이번에는 그 투자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본비용인 금리마저 올라가게 한다.

하물며 기업은 취약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고 (부도 위험) , 매크로 경제는 인플레이션 유발적으로 운영되고 (인플레이션 위험) , 원화는 억지로 고평가돼 있어 대 (對) 달러환율 상승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다 (환율 위험) .이 세가지 위험은 프리미엄으로 가산돼 금리를 더 오르게 한다.

이런 가운데 돈을 더 빌려 달라고 기업이 아우성치면 금리는 그 만큼 더 올라간다.

그 위에는 관치성 은행금융기관의 비능률 비용마저 올라타 있다.

이러한 조망 아래서 우리가 선택할 적응적 변화는 저성장에로의 감속 전환이 있을 뿐이다.

이렇다고 보면 '경제회생' 을 들고 나오는 대통령 후보들은 무식꾼이거나 속임꾼이거나 용기없는 아부꾼들이다.

경제회생이란 무엇인가.

고용을 증대하고 투자를 확대하자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하면 필연적으로 고비용만 더욱 확대한다.

저성장에로의 이행은 고비용을 잠재우는 한편으로 저효율을 고효율로 끌어 올리려는 반작용적 도전이기도 하다.

저효율의 첫째 가는 원천은 정부다.

정부에 할 일이 많고 일할 사람이 많으면 경제는 저효율로 떨어진다.

정부의 크기.역할.간섭의 축소는 시장의 크기.역할.자유의 확대로 연결돼야 한다.

정부의 크기를 묶는 조치 가운데 하나는 조세 부담률을 국민총생산의 20%에 묶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은행법을 고쳐 은행에 주인을 찾아주고, 증권거래법을 고쳐 증권시장에서 1대주주권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며, 외환.외자 관련법을 고쳐 누구나 자기신용으로 외국돈을 빌릴 수 있게 하며, 공정거래법을 고쳐 정부가 대기업의 코를 꿰어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노동관계법을 고쳐 노동의 유연성을 보장하고, 그 외에 수다한 기업규제를 혁파함으로써 정부의 역할과 간섭을 줄여야 한다.

여기엔 고통이 따른다.

특히 노동자와 기업의 고통이 심각할 것이다.

이 고통을 제어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구체적 공약을 점수로 매겨 가장 높은 후보에게 나는 투표하려고 한다.

다만 후보 전부가 마이너스 점수일 때는 기권할 것이다.

강위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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