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달러 박스’ 해운업에 메스 … “환부만 도려내 조기 회복 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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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77개 해운업체에 대한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다. 이를 통해 회생 가능성이 있는 곳은 채권단의 지원을 받아 경영 정상화에 나설 수 있다. 부실로 판정된 해운사는 금융지원을 받지 못한 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거나 퇴출될 수도 있다.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에 빠져들면서 물동량이 줄자 운항을 포기한 화물선이 늘고 있다. 사진은 최근 부산 남외항에 화물선 수십 척이 정박해 있는 모습. [중앙포토]


5일 정부가 발표한 ‘해운업 구조조정 추진 방향’에 따르면 주채권 은행들은 금융권의 총 대출이 500억원 이상인 37개 해운사에 대해 신용위험 평가를 해야 한다. 평가는 당초 6월 말까지로 예정돼 있었지만 해운업계의 부실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고려해 5월 초로 앞당긴 것이다. 나머지 140개 중소 해운사에 대해선 6월 말까지 은행들이 평가해 지원이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여부를 결정한다.

평가 결과 B등급(일시적 자금 부족 기업)에는 자금을 지원하고 C등급(부실 징후 기업)은 워크아웃에 넣을 계획이다. D등급(부실 기업) 해운사에 대한 금융지원은 중단된다.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과 자산관리공사는 사모투자펀드(PEF)에 출자하고, 이를 통해 해운사의 배를 사들이는 방안도 추진된다. 배에 투자하는 선박펀드에 대한 규제도 완화된다. 4월 국회에 제출될 선박투자회사법 개정안에 따르면 펀드가 배를 사들인 뒤 일정기간(최소 3년) 보유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사라진다. 매매가 활성화되면 선박 단가도 높아질 것이란 이유에서다. 또 선박펀드에 대한 현물 출자나 주식 추가 발행도 허용된다.


◆특수 상황 고려한다=정부와 채권 은행은 건설·조선업에 대한 평가 작업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고려해 해운사 등급 평가를 매우 신중하게 할 방침이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단순히 재무적 상황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해운업계의 특수 상황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37개 중대형 업체 중 C·D등급을 받을 업체는 2~3개에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형식적인 구조조정이라는 비판이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은 해운업의 구조적 특성 때문이다. 177개 해운업체 가운데 150여 개는 상위 20개 사의 하도급 업체다. 큰 곳이 하나라도 무너지면 연쇄적으로 충격이 미치는 구조다. 따라서 부실 판정을 받은 업체가 최소한에 그친다 해도 업계 전체에 미치는 충격은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와 은행들은 6월 말까지 신용평가가 마무리돼도 건설·조선업에서 한 것처럼 평가 결과를 일괄 발표하지는 않기로 했다. 권혁세 금융위 사무처장은 “B·C등급을 받은 업체도 회생이 가능한데 명단을 공개하면 자칫 해외 영업력이 악화되는 등 부작용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자금난 덜어준다=국책은행과 자산관리공사가 해운사들의 배를 사주는 것은 이들을 고정자산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다. 해운업계에선 2005년 이후 고가로 사들인 선박이 100여 척인 점을 감안해 5조원가량을 들여 최소 60~70척은 사들여야만 업계의 자금난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금융위기로 국책은행의 자금 여력이 크지 않은 데다 선뜻 선박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업체들이 호소하고 있는 달러 부족 문제는 이번 지원 대책에서 빠졌다. 국내외에서 배를 빌리는 계약은 모두 달러로 이뤄지는데 상당수 업체가 해외 선주에게서 빌린 배에 대한 요금을 지불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해운업체 관계자는 “해운사들은 선박을 빌려주기도 하고, 빌리기도 한다”며 “그러나 들어올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는 데다 달러 값이 급등하면서 곤경에 처한 업체가 많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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