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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콩트 '그 밤에 달뜨거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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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군주가 한번 실정하자 나라 살림에 백성들 가계까지 와그르르 무너지는 가운데 사방에서 영웅이 나타나 후계를 자처하는 등 수십년 고이 지켜온 공국의 위엄과 위계는 풍전등화로 흔들리는 지라. 외국과의 교역은 급감하고 장사는 위축되어 부자들은 시중의 전폐들을 거둬들이기에 급급해 하니 인민들의 시름만 시시각각 깊어 가더라. 내노라 하던 상사와 표국들도 하루 아침에 나동그라지고 거리 곳곳엔 업소에서 내쫓긴 자와 천직을 잃은 자와 생업을 구하지 못한 자만 즐비한 중에도 그 해 중추가절은 어김없이 닥쳐왔다.

성수는 서른 네 살 된 자로 중소한 모 기업에 다니다 연쇄 부도의 여파로 졸지에 실직한 바 되었는데, 연전에 명퇴한 정도씨의 장남이니 설상에 가상으로 한 집안에 궂은 일이 두 번이나 겹치게 되었다.

윤달 낀 그 해의 때 이른 추석 전야에 미처 삭지 않은 더위를 피해 집 마당에 정도씨와 그의 아들 성수, 또한 초등교에 다니는 손자까지 삼대가 나와 수런거리는데 마침 만삭으로 차올라야 할 하루 모자라는 보름 망월이 자취도 보이질 않으니 사위는 침중하여 어둡기만 하였다.

하필 천문국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오고 보름치 하는 탓에 달 보기는 애시당초 그른 줄 알라' 고 진작에 예고가 있은 터였다.

"이 어인 일이란 말이냐. 아무리 시속이 변했다손 치더라도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집을 나가고, 또 전화 기별 한 번 없이 가정을 지켜야 할 아녀자가 이틀씩이나 집을 비우다니 이게 어찌 언설로 설명될 일이더냐. "

"이 모두가 불초 소자의 허물이옵니다.

꾸짖어 주옵소서. "

부자간 대화를 가만 들은 즉슨 성수의 처가 가출하였음을 탄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느 때도 아니고 명절을 앞둔 시점에 가출이라니 그 곡절이 간단치 않을 듯 싶다.

"그래 처음 사단이 어찌 시작되었다고?"

"예, 아버님. 영철 어멈은 어제 아침만 해도 멀쩡하였사옵니다.

어머니 없이 어떻게 차례를 지내야 할지 아득하고, 당장 제물 장을 봐와야 하는데도 무엇을 사야 하는건지 당최 모르겠다길래, 제 말이, 어머니 모시고 살림 시작한 게 어언 십여 년이고, 추석과 설 외에도 한 해 지내온 제사가 몇 차롄데 어머니 아니 계신다고 마련해야 할 제물 가짓수를 막막해 하면 되겠느냐고, 하면 내가 같이 따라가 둘이 서로 기억을 도와가며 사보자고 했지만 굳이 혼자 가겠다며 고집을 피웠습지요. "

말이 좋아 서로 기억을 도와가며 시장을 같이 다녀오자는 것이었지 성수의 그 제안은 아무래도 사려가 충분치 못하였음이라.

"어허, 아범은 어찌 그리 생각이 짧을고. 회사를 퇴근하고 내외간에 오순도순 한가위 제물 장을 보러 가면 그보다 더 흐뭇한 광경이 없을 터지만 실직한 주제에 장바구니 들고 마누라 꽁무니 쫄랑쫄랑 따라간다 했을 때 남세스러운 건 둘째 치고, 아내된 사람은 그 얼마나 비애가 클 것인가를 왜 헤아리지 못 하였단 말인가!"

'실직한 주제' 를 말할 때의 강세를 보건대 정도씨는 잠시 아들과 오십보백보인 처지를 망각하였다 할 수 있었으니, 성수는 울컥 서운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듣기에 좋으라 명퇴지 오십오세에 쫓겨난 아버지가 대기업의 하도급업체에 근무하다 어음할인 길이 막혀 부도난 직장을 잃은 아들을 눈치 준다면 세상 어떠한 똥묻은 개도 다른 개 재묻은 걸 탓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헌데 어멈의 심기가 어색해진 건 그 때문이 아니옵고……. "

"그럼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예. 돕겠다는 제 청을 뿌리치고 혼자 시장에 갔던 어멈은 엊그제 산 또또복권이라도 당첨된 듯이 희색이 만면하여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사연을 물었더니, 나물과 과일 육고기에 생선까지 사는데 십만원도 채 안 들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고. 아버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요즘 십만원이 정녕 돈이기나 하온지요. 어머니 모시고 제물장 보러 가면 지갑에 이십만원을 담고 나서도 바구니에 산 게 없다고 혀를 차며 한탄하시던 지난 제사 때 모습이 눈에 선한데…… 천정부지로 오를 만큼 오른 추석 물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바리바리 지고 오면서 십만원도 아니 들었다며 희희낙락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철없다 싶었습지요. "

"철이 없다니? 어멈이 상담과 흥정에 능하여 많은 물건을 사온 것이 어찌……?"

"아버님도 참. 이 세상이 그 정도로만 호락호락해 준다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겠지요. 소자는 바구니의 제수거리들을 하나씩 꺼내놓으며 말했습니다.

고사리며 고구마 줄기 토란 줄기 도라지 …… 여기 이 생선들, 양태 병어 숭어 조기……, 여보 부인 어느 것 하나 중국산 아닌 게 없구려. 고기는 호주산, 과일은 사과 배 말고는 바나나에 오렌지까지……. 신토불이하며 조신불이 (祖身不異) 한데 어쩌자고 모두가 외산들뿐이란 말이오. 아무리 어려워도 조상 모시는 차례상만은 옛날처럼 풍성하진 못해도 내 땅에서 거둔 산물로 차려야만 하는 것을……. "

정도씨는 성수의 설명이 여전히 맘에 차지 않았다.

"어허참 어멈을 억지로 내쫓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어디……! 집안의 사내들이 모두가 직장을 잃은 터수에 그래도 험악한 살림을 챙겨 보겠다고 절약하느라 꾀를 낸 것인데 그걸 타박하고 말았고만. 그대는 어찌 그리 속이 좁은가.

요즘 같은 국제교역시대에 제물이 토산품이면 어떻고 외산이면 어떻다고. 또 경기가 나쁜 참에 지구촌 다른 음식도 흠향하시면 그도 좋은 일이고, 또한 그리하여 조상님들이 우리들 사는 형편도 일찍 헤아리셔야 발복운을 틔워줄 일 아닌가. "

토로가 길어질수록 자신에게 돌아오는 죄과가 커진다는 걸 느꼈음에도 성수는 아뢰기를 멈출 수가 없었으니.

"죄송한 일이오나 그 때문만은 아닌 듯 하옵고……."

"그럼 또 무슨……?"

"예. 이실직고하자면 외산 제물에 빗대어 제가 말 실수를 잠깐 하였나이다. "

이를 어찌 할고. 성수는 장바구니 앞에서 마침 지난 밤 일이 생각나 한 마디 비아냥을 더 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파예든지 다이애난지, 외국 것들 멋있고 아름답다며 칭송이 자자 하더니 조상 모실 제물까지 외산 일색으로 사온 것 보면 외제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은 거 아니오?"

"그건 또 무슨 소린고?"

"예. 그렇잖아도 회사 부도 사태를 전후하여 몸이 예전만 못 하고 점차 기력이 쇠하여……. "

"어허 그게 바로 실직증후군이라는 병의 주요 증세야. 그대 어미가 봇짐을 싼 것도 바로 그 때문 아닌가.

수많았던 젊은 날의 헌신과 열혈 봉사는 까마득히 잊고는 빈 쭉정이 되었으니 이혼하자?

그런 못된 여편네가 또 어디 있을꼬?"

얘기의 방향이 잠시 곁으로 삐지고 있지만 정도씨 부인이 당대에 유행이던 말년 이혼을 결심한 것이 정도씨가 말하는 신허성 (腎虛性) 실직증후군 때문만이 아니었음은 익히 짐작이 가는 바. 성수에게서 보듯 정도씨 역시 옹졸하고 소심하기가 누구 못지않아 젊은 날 오랜 기간 부인 닦달을 몹시 해대었고, 자식들 교육 문제 때문에 후일을 도모하였다가 적지 않은 퇴직금이 떨어지는 시기를 기다려 기어이 이혼을 제의하였으니, 티격태격하다 올 초에는 급기야 이혼을 전제로 한 별거를 결행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날도 변변찮은 꼴을 보여 가뜩이나 민망한 판국인데 어멈이 다이애나 말을 꺼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홧김 서방질이 용납되고, 자식 둘을 두고도 거리낌 없이 이 사내 저 사내 품을 돌아다녀도 칭송될 수 있는 영국이 부럽다나요. 졸지에 이 동방예의지국 언론들도 덩달아 예찬 분위기고 또 요사이 제 사정도 사정인지라 그 때는 꾹 참았었는데……, 결국 터지고 만 것이지요. "

정도씨는 그제서야 할 말이 막혔는지 죄 없는 담배만 연신 갈아 뿜어댔으니, 답답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어찌 되었건 아녀자들 없이 우리만 남아 제상을 차리게 되었으니 조상님들 뵈올 일이 걱정이구나. "

형편이 그쯤 되었으니 탄식이 없으면 그도 거짓일 터이고, 천지사방은 왜 또 그리 어두운지 도무지 명절 맛은 간 데 없어, 천문국의 예보관이 야속하기 그지없는데 어둠 저 편에서 희뿌연 빛가루가 잠시 흩날리는 게 아닌가.

천문국 첨단 관측기제의 강력한 자존심을 헤치고 퍼지는 저 빛무리야말로 참으로 장렬한 월광 (月光) 아닐는지. 그때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다툼 언성이 거세지자 마당 끝에 가 서성이던 아이가 나지막이 외치는 소리. "아버지! 할아버지! 저기, 저저기 엄마 아니에요? 엄마예요. 아 할머니.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와요. "

오호라 그리하였고나. 다툼 끝에 집 나가 어디 한데서 이슬잠 잔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 구슬려 명절 쇠자 하였고나. 그리하여 두 여인네가 달빛 앞세워 나타났으니 이 아니 경사인가.

만월이 기세 좋게 떠오르니 이 밤이 지나가면 내일의 태양 또한 충천하여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 넉넉한 음덕으로 인하여 훼손된 양기를 보충토다.

정도씨 부자는 너무도 고마워 눈물을 짤 수도 만세를 부를 수도 없어 각자 딴전만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대저, 우리 여성들더러 추락한 경제의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우리 여인네더러 경세제민하라는 것도 어불성설일 것이나 분명 우리들 쇠락한 애드벌룬에 청량한 공기로 하나 가득 채울 수는 있을진저. 후일 더욱 위기에 처한 일부일처 시대의 못난 사내들이 그날의 휘영청 달 떠오름을 가리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라고 외쳐대더라.

유정룡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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