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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차이나]“한국이 중국문화 전승에 기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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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가 과거 동양문화의 주축이라는 점에서 더 나아가, 과거의 동양은 대부분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는 내용은 많이 들어 본 중국 일반 네티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를 '천박한 애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중국 내 학자들의 수준도 별반 나을 게 없다. 조공과 책봉의 국제관계를 철저한 주종과 지배 및 예속의 관계로 보는 관점에서는 네티즌과 차이가 없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 사이트 인민망은 올해 2월20일 거젠슝(葛劍雄) 푸단(復旦)대학 교수의 ‘왜 한국이 중국문화 전승에 기여했는가’라는 칼럼을 실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그는 “선진(先秦)시기부터 청(淸)말 중국이 청·일전쟁 패배로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독립국을 인정할 때까지 한국은 중국에 예속 정도와 친소(親疏)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의 번속국”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의 옛 사대부들의 거의 대부분 묘비에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대청조선국(大淸朝鮮國)’이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한국은 기본적으로 중국에 자발적으로 예속했다고 말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한국이 보존한 것일 뿐 중화문화의 자랑이라는 아전인수식 궤변을 펼쳤다. 거 교수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애국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기본적인 역사사실을 모른다면 어떻게 애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며 철부지 중국 네티즌들의 ‘천박한’ 애국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거 교수의 논리 저변에는 노골적인 중국 우월론이 깔려있다. 마치 라틴어 문화의 힘을 강조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문화는 모두 라틴문화라는 식의 논리를 펼치는 셈이다. 우리로서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아래는 거젠슝 교수의 칼럼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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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광저우 ‘링난(嶺南)강단’에서 한 편의 연구보고를 한 바 있다. 청중들의 질의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이 중국 전통 문화 보전에 공헌을 했다고 발언했다. 언론 보도가 나가자 큰 논란이 벌어졌다. 심지어 인터넷에서 나를 ‘매국자’라느니 ‘한국에 아첨’한다느니 하는 각종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다. 본래 어떤 논리나 관점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제기하는 토론과 반론은 모두 합당한 뜻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술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진리로 드러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본 반대의견들은 뜻밖에도 기본적인 역사 사실조차 무시하거나 어떤 것은 한마디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라 울지도 웃지도 못할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러니 먼저 역사적인 사실부터 이야기하도록 하자. 일찍이 선진(先秦)시기에 지금의 조선반도에는 이미 중원에서 옮겨간 많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요동(遼東)에 인접한 서북부 지역에 많이 분포했다. 진한(秦漢)시기 세워진 위씨(衛氏) 조선은 중원 이민자들이 주체가 된 나라였다. 서한(西漢) 무제(武帝)가 강토를 개척하면서 영토가 조선반도 북부까지 넓어졌다. 요동과 조선에 사군(四郡)을 설치해 조정에서 직접 관할했다. 내지의 행정제도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통치한 것이다. 동한(東漢) 후기 관할구역이 비록 축소됐으나 중국의 삼국, 서진(西晉)시기에 다시 확대하여 새롭게 일급 행정구역인 영주(營州)를 설치했다. 6세기 후반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중원 정권과 관계를 끊었다. 당(唐) 고종시기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다시 한번 직접 통치를 진행했다. 원(元)왕조가 조선을 정복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했으나 대내적으로는 국왕을 잔존시켰다. 명(明)·청(淸) 두 왕조는 조선을 번속국으로 두었고 갑오전쟁 패배 후에 일본과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은 후에 비로소 그 독립 지위를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지금 소수 한국인이 온갖 방법으로 중국과의 역사 관계를 끊고, 어떤 이는 본말을 전도하여 사실을 날조하려 하고 있지만 역사상 조선은 줄곧 중국의 일부분으로 자처하거나 천조(天朝)의 번속국임을 영광으로 여겼다. 나는 한국에 가서 두 눈으로 거의 모든 고대 사대부의 묘비에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대청조선국(大淸朝鮮國)’,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라 새겨 놓은 것을 확인했다. 특히 명조 만력(萬曆)년간에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 후 조선의 군신들은 은혜에 감사했다. 청조가 중국 내부로 진입한 후에 조선은 나라가 작고 백성이 빈궁함에도 불구하고 명조의 회복을 도움으로써 ‘생명을 구해준 은혜[再造之恩]’에 보답하려 했다. 목숨을 걸고 청조의 단발령과 복식령을 거부한 이후에 계속 ‘한족(漢族)의 의관’을 고수했다. 19세기 말 내란과 외환이 심해져 망국의 위기에 닥쳤을 때에도 종주국인 청조에 출병하여 원조해줄 것을 희망했다.
기원 전 2세기 서한(西漢)의 판도에 편입된 이래 조선 북부는 중원 왕조의 일부분으로 수백 년을 이어왔다. 중국문화가 그 곳의 주류 문화가 된 이래 조선반도 전통문화의 원류와 주체로 작용했다. 그때부터 조선은 직접 한자를 채용했다. 자기의 문자를 제정한 후에도 한자는 여전히 관방의 정식 문자로 남았다. 조선의 주요 제도, 주류문화, 윤리도덕, 학술문화는 모두 중국에서 전해져 그 기초 위에서 발전했다. 서한 말 조선 북부의 방언과 ‘연대(燕代: 지금의 허베이북부, 산시 서북부와 일치)’ 일대 사람들의 말은 일치했다. 조선의 대가족은 모두 그 조상이 중원의 성씨에서 연원한다고 자칭했다. 기자(箕子), 주공(周公), 공자(孔子), 태원왕씨(太原王氏), 청하최씨(淸河崔氏), 형양정씨(滎陽鄭氏), 하동유씨(河東柳氏) 등 조선에는 수많은 ‘후예(後裔)’들이 존재했다. 이는 중국과 중국 문화가 고대 조선에서 숭고한 지위에 있었음을 반영한다. 하물며 문화는 결코 강역을 경계로 할 수 없다. 조선과 중국의 관계는 부속되거나 때로는 나뉘어 있기도 했고, 밀접하거나 소원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 조선반도는 줄곧 중국 문화에 속한 지역이었음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 문화의 원류는 중국 문화다. 단 전승 과정에서 조선반도라는 구체적 조건에 근거하여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창조한 것이다. 이는 한국 문화의 성취이며 이는 또한 중국 전통문화에 대한 공헌이다.
공자는 일찌기 "즉 예를 잃었으면 초야에서 찾아내야 한다(禮失求諸野)"라고 말한 바 있다. 화하(華夏)의 여러 민족들이 황하의 중상류 지역에서 형성한 화하(漢) 문화는 인구의 이동, 경제와 문화의 교류에 따라 점차 중원 왕조와 번속국으로 확대됐으며 중국 문화의 주체를 형성했다. 그 발전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 각종 문화현상은 파도의 모양과 같이 중심에서 주변으로, 발달된 선진구역에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주변 지역은 왕왕 지형이 폐쇄됐거나 교통이 막혀있고 인구 이동이 적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심지역이나 발달지역보다 늦다. 이러한 문화지체현상은 도리어 문화의 보존과 연속으로 나타났다. 중심 지역에서 일찍이 소멸된 문화현상이 도리어 주변부 또는 폐쇄된 지역에서는 장기간 존속할뿐더러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당연히 이러한 문화는 그 곳의 주류문화로 인정받아 현지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게 여겨진다. 또 부단히 발전해 어떤 방면에서는 심지어 모체문화를 뛰어넘는다. 이렇기 때문에 공자는 ‘야(野)’에 가서 중원이 이미 잃어버린 ‘예(禮)’를 찾는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에서 이미 잃어버린 ‘예’ 역시 한국에서는 온전하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예’를 얻어 널리 알린다면 이것이 바로 중국문화에 대한 조선인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어찌 중국 문화 자체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한국은 1972년 세계문화유산에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 등록하는데 성공했다. 137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중국의 명나라 홍무(洪武)연간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예실구제야(禮失求諸野)’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종이와 활자인쇄는 중국이 발명한 것이다. ‘직지심체요절’의 주요 내용은 ‘경덕진등록(景德鎭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등 사전부(史傳部)의 불경을 널리 읽은 후에 역대 불교계 여러 선사들의 게(偈)·송(頌)·찬(贊)·가(歌)·명서(銘書)·법어(法語)·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중요부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분을 초록한 것이다. 분명히 한나라 때 전해진 불교와 중국에서 탄생한 선학(禪學)은 한자를 사용했다. 그 자체가 중국 문화의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중국에서 그보다 더 오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화 산물은 확실히 한국인이 창조한 것일 수도 있고, 중원으로부터 전래된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한국인들이 완전하게 보존해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모두 중국 문화에 대한 공헌임은 확실하다. 만일 이후 중국에서 더 오래된 유형의 인쇄물이 발견된다면 다시 이를 신청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세계문화유산의 기록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후에 새로운 발견이 없다면 그것으로 중국의 불교문화와 인쇄술, 제지술을 대표하여 세계에 전시하면 된다.
또 청조가 들어선 뒤 머리카락을 자르고 복식을 바꾸면서 명대의 복식은 중국에서 기본적으로 사라졌다. 단지 조선에서는 19세기 말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이 같은 예는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 중의 많은 수는 중국에서 이미 소실돼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애국 열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기본적인 역사사실을 모른다면 어떻게 애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과는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정리=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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