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31곳만 규제 … 실효성 상실” … 출자총액제 멍에 마침내 벗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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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경제에서 다른 기업에 대한 출자는 원칙적으로 기업이 자율적으로 판단해 결정할 문제다. 전 세계에서 최근까지 기업의 출자총액에 대한 규제를 유지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우리와 비슷한 규제를 하던 일본은 이미 2002년 ‘대규모 회사의 주식보유 총액 한도제’를 폐지했다.

이 제도는 1986년 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을 막고 시장 경쟁을 활성화하기 위해 도입됐다. 외환위기 때인 98년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해 기업에 경영권 방어수단을 주기 위해 폐지했지만 경제위기가 잦아들면서 2001년 부활했다.

하지만 투자 부진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끊임없이 규제 대상이 줄고 예외 규정이 더해졌다. 시장의 자정 능력이 커져 무리한 문어발식 확장을 한 기업은 주식·채권시장에서 된서리를 맞게 돼 정부 규제 필요성이 적어진 것도 원인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 끝 무렵인 2007년 적용 대상을 대폭 축소하고, 출자 한도도 순자산의 25%에서 40%로 올리면서 출총제 대상 회사는 343개에서 31개로 확 줄었다.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 집단에 속한 회사 543개 가운데 94%인 512개 사가 출총제 대상이 아니다. 이마저 이번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출총제가 폐지된다고 당장 기업의 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국내외 경기가 워낙 나쁜 데다 이미 규제 완화로 대상 기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출자 한도가 꽉 차 추가 출자를 못 하고 있는 회사는 금호석유화학·금호타이어·한진에너지·STX조선 4개뿐이다.

그러나 투자 심리에 미칠 영향은 적지 않아 보인다. 출총제가 그간 대기업 규제의 상징처럼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은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규제로서의 실효성은 이미 많이 떨어져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투자 활성화를 위해 상징적 기업 규제를 푼다는 심리적 의의는 클 것”이라고 말했다. 백 위원장은 “앞으로는 (출총제 같은) 사전 규제보다는 기업에 자율권을 준 뒤 시장에서의 반칙 행위가 적발되면 엄단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황인학 산업본부장은 “그동안 기업 투자를 가로막던 상징적인 규제인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폐지를 적극 환영한다”며 “이명박 정부의 시장 친화적 제도개혁에 큰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출자총액제한 제도=자산 10조원이 넘는 기업 집단에 속한 자산 2조원 이상 회사는 순자산의 40% 이상을 다른 회사에 출자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다. 한마디로 대기업은 다른 회사 주식을 일정 한도 이상 갖지 말라는 뜻이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10조가 해당 내용을 담고 있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 적용 대상 기업 (굵은 글씨는 대기업 집단, 작은 글씨는 계열사)

삼성 삼성전자·삼성중공업·삼성물산·삼성SDI·SLCD·삼성정밀유리·삼성에버랜드·삼성전기·제일모직 현대자동차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하이스코 SK SK건설 롯데 롯데쇼핑·호텔롯데·롯데건설·호남석유화학·롯데제과 GS GS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중공업·현대미포조선 금호아시아나 금호석유화학·금호타이어 한진 대한항공·한진해운·한진에너지 STX STX조선·STX팬오션 신세계 신세계
자료 : 공정거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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