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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6. 신중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예술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말한다.

이런 말은 바로 우리의 신중현한테 딱 맞는 말이다.

왜 말머리에 하필 그런 얘기를 꺼냈느냐하면 고백하건대 나는 그에 대해서 작품이외에 정말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와 나는 약 30년간 똑같은 무대에서 활약해 왔다.

노는 동네가 같았다는 뜻이다.

당시 경음악계의 등용장소였던 소위 미8군 쇼단에서 활약한 것부터 그렇고 다음 흑백텔레비전으로 옮겨와서 일반 음반계를 병행해서 활동무대를 삼은 것도 그렇다.

내가 들고나온 '딜라일라' 나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 , 그리고 이장희의 '그건 너' 등속이 70년대의 국민정서에 마치 수소폭탄처럼 파격적으로 들릴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찍이 60년대 중반부터 빨치산처럼 등장했던 '커피한잔' 이라는 신중현 특유의 초기 포크록이 이미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신중현 전기기타 소리가 '딩' 히고 울리기 전까지는 그까짓 악기소리는 크게 중요시 할 필요가 없는 이미자.배호.남진.나훈아의 완벽한 트로트 전성시대였다.

파죽의 기세로 승승장구하던 트로트의 대군앞에 홀연히 맞선 신예 청바지부대의 야전사령관이 바로 우리의 신중현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내 얘기의 핵심은 지금부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와 나 사이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래저래 30년 가까이 수없이 많은 무대에 같이 서기는 했지만 하여간 나는 그와 함께 차 한잔을 마시거나 중요한 얘기 한마디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작곡가와 가수로서 "어이, 노래 한곡 안 불러줄래?" 혹은 "선배님 노래 한곡만 작곡해주십시오" 식의 통상적이고 의례적인 대화조차 없었다.

가수 김추자.장현.펄 시스터즈.박인수.김정미등속은 뻔질나게 그의 곡을 받아냈지만 나에게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뒤늦게나마 나의 섭섭함을 표현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기존에 사귀어 놓은 자기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그가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이요 무사교의 사람임을 증언하려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그는 음악이외에는 매사에 무능하거나 무심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가한테 왕왕 나타나는 징표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음악 뿐이었다.

그 모든 기능은 음악속에서만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헤비메탈 사운드의 시조임이 분명하련만 실제 모습은 지미 핸드릭스류의 그 흔한 거친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얌전하고 조용한 동양계 로커였을 뿐이다.

활활타는 연주와 달리 그 스스로는 의외로 조용한 록뮤지션이라는 것은 최근에 그의 아들 대철을 만나보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아비의 피가 어디 가겠는가.

아들 역시 묻는 말 이외에는 입을 열줄 모르는 무음 (無音) 의 인간이었다.

말이 없으면 다 예술가인가.

물론 아니다.

쉴새없이 재잘거리며 악상을 만드는 천재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조용한 신중현의 천재성은 약간의 음악적인 소양만 있으면 금새 파악된다.

가령 그가 손수 만든 불후의 명곡들인 '빗속의 여인' '커피한잔' '님은 먼곳에' '봄비' '님아' '아름다운 강산' 등등이 일사불란하게 이땅의 음계인 조선조 '궁상각치우' 로 일관되어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드러난다.

나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다.

조선음악에 관한 한 땅에는 김순남 이래 신중현이 있었다.

또 윤이상 이전에 이미 신중현이 존재했다.

서양악기를 든 사람이 서양음계를 모를리 없건만은 일견 옹색해보이는 우리의 음계만을 구사한 그의 집념은 가위 처절할 정도였다.

왜 그의 곡들이 이선희 ( '아름다운 강산' ) , 신효범 ( '님아' ) , 봄여름가을겨울 ( '미인' ) , 조관우 ( '님은 먼곳에' ) 등에 의해 20년이 지난 지금도 자꾸만 반복돼 불리워지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그의 곡들은 그야말로 명곡이기 때문이다.

기막힌 일이다.

대중음악에도 클래식에 비견되는,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명곡이 존재하다니. 참 미안한 얘기지만 서태지의 노래는 우선 어른들이 모를뿐 아니라 '핑계' '쿵따리 샤바라' 등은 그때의 유행이 지나면 바로 실효성을 잃는 노래들이다.

다시 재탕해서 불러보기는 어쩐지 찝찝해지는 노래들이다.

이렇듯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노래는 반드시 따로 존재한다.

살아있는 마이클 잭슨보다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가 월등하게 위대한 것은 바로 명곡과 명곡 아닌 것의 차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궁상각치우의 5음계만 구사하면 다 명곡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신중현은 우리 5음계에다 우리네 고유의 가락과 장단을 질펀하게 깔고 트위스트에서 고고에 이른 댄스리듬, 흑인 피에서 우러나온 소울리듬, 그리고 평화의 상징 히피즘과 동반자였던 사이키델릭 사운드까지 몽땅 섞어버렸다.

동서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네 특유의 트로트도 아니고 필자가 구사했던 얼치기 스탠다드 팝도 아니며 전통민요나 판소리의 아류도 아닌 고유의 신중현 브랜드를 창출해낸 것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독자적인 한국 대중음악의 가이 혁명적 태동이었다.

여기서 절대로 간과해선 안되는 것이 신중현의 문학성이다.

가락과 음률을 전부 빼고 그가 손수만든 가사만을 읽어보라. 최첨단 시문학을 그대로 꿰뚫는다.

가령 '님은 먼곳에' 에서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랑" 아!

소월.정지용.김수영을 방불케하지 않는가.

또 한가지 빠뜨려선 안될 것은 명시 없이는 결코 명곡다운 명가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기 몸집보다 큰 듯 보이는 전기기타를 독학으로 배워 울러멘 우스꽝스런 모습의 신중현은 70년대 대마초파동으로 의례 위대한 인물이 거쳐야하는 시련을 순전히 타의에 의해 경험했다.

진짜 우스꽝스런 일은 필자보다도 훨씬 왜소하고 남루하며 꾀죄죄해보이는 그가 일찌기 모종의 스캔들에 연루됐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두고두고 한탄한 것은 그런 사건이후 단 한번도 자신의 억울함이나 누명에 대해서 가타부타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우 특이하게도 그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행적은 마치 그의 세 아들들이 대리로 증언을 하고 있는 듯해 보기에 참 흐믓하다.

나도 아들이 둘씩이나 있다.

그러나 내 아들들은 앞으로 아비의 피를 이어 음악을 하리라는 조짐이 전혀 안보인다. 내 자신이 그들에게 물려줄만한 음악적 피가 영 모자란 탓이리라. 천재성에 관한한 나는 신중현과 비교도 안된다.

이젠 아들들이 아비의 옛터에서 활약을 하는 시대가 됐다.

과연 급변하는 세상이다.

이제 또 세상이 달라져서 가수나 배우보다도 공을 잘 던지는 야구선수가 월등한 영웅대접을 받는다.

뮤즈 (음악의 요정) 보다는 근육질이 찬미되는 시대다.

그래서 나는 신중현의 추억이 더욱 애틋하다.

나는 우연히 차를 타고 영등포 근처를 지나다 조그만 나이트클럽 간판에 신중현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아이쿠 저 사람 죽은 다음에 뒤늦게 무덤에 꽃다발 들고 찾아가지 말고 살아있을때 음악이나 좀더 귀담아 들어주지…" 하고 부질없이 중얼댄 적이 있다.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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