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필링]만화엔 희망 있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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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42면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청소년보호법의 위력은 하늘을 찌를 듯하고, 그 중에서 마녀사냥의 첫번째 표적이 된 것은 만화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중에 세상만사, 정치와 경제위기 따위가 다 무슨 문제가 있냐고 눈감은 것처럼 여겨졌던 스포츠지들이 아마도 모든 언론 중에서 가장 과격한 표현과 과감한 지면할애를 통해서 만화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앞장 섰다 (나는 스포츠지들이 이렇게 정부정책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기의 이해관계란 얼마나 위대한가! 나는 그것이 정말 신기할 정도다) . 나는 만화의 탄압을 둘러싼 문제로 젊은 만화가 한 사람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매우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고 나섰는데, 그 의견에는 정말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나 다소 심술궂은 생각도 들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만화를 베끼는 만화가들은 문제가 아닌가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완전히 내 생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단정지어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일본만화가 개방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건 영화하는 모든 사람과 정반대되는 생각이다!

) .지금 한국의 만화는 모두 일본만화를 보고 배운 것이며, 더 안타까운 것은 수준 높은 일본만화를 그런 식으로 막아놓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만화독자들이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만화는 산업적으로 완전히 붕괴할 수 있지도 않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경쟁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붕괴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이런!

) .그래서 능력이 안되는 만화가들이 완전히 자리를 떠나고 그 자리를 좋은 만화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그 다음 세대들이 좋은 만화를 보고 배워서 정말 좋은 만화작가의 탄생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것이 진짜 희망 아니냐고 거꾸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어렸을 때 접한 만화는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그때 흉내나 내고, 베끼고, 베끼다 보니 성의도 없고, 아이디어도 없고, 우리나라 만화인 줄 알았더니 나중에 그것이 파렴치하게 베낀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부끄러움과 분노를 갖는 것보다는 그런 작가들은 모두 없어지는 편이 정말 낫다, 라고 말했다.

나는 문화산업의 논리로 반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작가의 만화에 대한 사랑과 만화를 보는 독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분노와 각오는 아예 말문을 막았다.

아니 이 젊은 만화가의 만화에 대한 사랑은 울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을 끌어안고 있었다.

영화를 하는 나는, 영화를 하는 나의 선배들과 동료들은, 영화를 만드는 현장의 예술가들은,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들은, 정말 이렇게 영화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진정 재능도 없고 가능성도 갖지 못한 채 다음 세대에게 방해만 되고 있다면 우리들은 기꺼이 영화적으로 모두 죽어버릴 수 있는가? 치사하게 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너무 뻔한 졸작을 형식실험이라는 말로 혹세무민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이해관계 때문에 비판에 대해서 입다물고 침묵하고, 심지어 무리지어 편들기에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무더운 8월 한달, 되지도 않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한국영화를 지켜보면서 나는 정말 만화에는 희망이 있지만 영화는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뿔싸! 그만 내가 이런 말까지 하다니.

<영화평론가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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