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흐름에 순응하는 나지막한 목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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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31면

억지 부리지 않는 정연한 질서와 강인함이 자연과 어울려 ‘차 없는 거리’는 그 생겨난 연유를 묻기에 앞서 이 길이 있음으로 해서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이 길에서 가능한지 궁금하게 한다. 건축가 민현식의 건축작업에서 보이는 정연한 질서와 강인함이 이 길을 통해 대학의 한 축을 아주 강하게 지지해 주고 있다.

내가 본 건축가 민현식

도서관에서부터 남문에 이르는 차와 사람이 섞여 있던 길을 혼돈에서 탈피해 차분하고 지성적인 사유의 길로 만들어 낸 것이다. 건축가의 정성과 자제력이 부담을 안고서 이겨낸 결과이며, 차가 없는 길이라는 그 사실 이상의 신비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차의 소란함도 거리의 요란함도 없는 이 길은 오히려 거칠고 오래된 신작로에 들어선 듯한 회화적인 느낌도 주고 있다.

건축가 민현식

억지스러운 길거리 부재들 같은 시선을 붙잡는 어떤 과장도 보이지 않는 대학의 일상을 기억하는 나지막한 목소리의 학교거리를 보여주려 한다. 내면의 깊숙한 사유를 정갈한 문장처럼 이 길에 쓴 건축가 민현식의 그간의 다른 건축 작업 역시 힘들게 억지를 부린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특히 이 대학의 동편과 서편에 각각 자리한 민현식의 여러 대학건물은 땅의 흐름에 순응하듯 평이하나 엄정하게 조직되어 있으며 ‘차 없는 길’에서 그가 지지하는 건축과 자연의 화합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길은 가벼운 언덕에다 평평하고, 느림과 편함을 위한 적정한 길의 이야기를 펼칠 소박한 도구들도 지니고 있지만 아주 가느다란 샘물 같은 물소리 또한 지니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아주 가는 물줄기를 길가에 심어 두어 그 옅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 낮은 소리들은 그동안 차에 뒤섞인 소음에 가려져 있다가 비로소 길을 통해 듣게 된 새로운 생명의 소리임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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