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 칼럼]'우물안 개구리' 스포츠 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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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의 머리속엔 스포츠기사와 제임스 레스턴이 묘하게 기억의 중층구조 (重層構造) 를 이루고 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레스턴이 스포츠기자 출신이란 강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한데, 내가 신문기자를 다시 시작하면 스포츠기자를 하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원망 (願望) 같은 것이 그 바탕에 깔려 있지나 않은지 자문 (自問) 해 보곤 한다.

아무튼 일세를 풍미했던 뉴욕 타임스의 명칼럼니스트 레스턴은 스스로 스포츠기자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웠고, 정치칼럼니스트로서의 그의 자질은 스포츠기사를 통해 닦였다는 것을 밝힌바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읽은 것이지만 그의 이런 내력이 나에겐 어떤 충격같은 것으로 머리속에 스며들었고, 이때문에 스포츠기사를 읽을 때마다 레스턴의 환영 (幻影) 이 나의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의 신문에서 스포츠기사는 정치기사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스포츠기자의 위상이나 자질이 정치기자의 그것보다 못하다거나 못한 것으로 인식돼선 안된다는 것과 동궤 (同軌) 를 이루는 것임은 물론이다.

사실 게임의 이론으로 볼 때 스포츠의 게임과 정치의 그것은 같은 차원의 것으로 다뤄질 수 있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돼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게임' 을 어떻게 기사화하느냐 문제는 기자의 자질도 자질이려니와 신문의 우열 (優劣) 을 판가름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스포츠기사에 있어선 게임의 내용을 전하는 생동성 (生動性) 과 감동성 (感動性) 이란 양축 (兩軸) 이 완전히 충족되지 않고서는 기사로서의 존재 이유가 없어져 버리고 만다.

흔히 스포츠기사에서는 기록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이라는 것도 생동성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고, 나아가 감동성으로 이어지지 않는한 기사로서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데 기사의 생동성과 감동성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너무나 표피적 (表皮的) 인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 아닌가 싶다.

한장의 사진이라든지, 기사를 쓴 문장력이 곧 기사의 생동성과 감동성을 뜻한다는 이른바 기사의 일반론에서 한 차원 뛰어넘는 것이 있지 않고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지면, 좋은 신문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레스턴의 칼럼을 통해서도 내가 느낀바 있지만 기사나 칼럼은 사실자체를 다루는 기자의 문장력이나 센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자의 이른바 지적 (知的) 바탕이라고 강조돼야 할 것같다.

기자가 역사와 철학 또는 사상에 관한 광범위한 지적 소양을 지닌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기사의 질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낳게 마련임은 구태여 설명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스포츠기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고, 또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시대상황이다.

다시 말해 스포츠기자는 전문성의 영역이 심화되면 될수록 더욱 높은 교양과 지적 축적이 요구된다는 이야기다.

레스턴의 칼럼 말고도 내가 애독했던 칼럼으로는 니혼게이자이 (日本經濟) 신문에 연재됐던 가네다 다케아키 (金田武明) 의 스포츠 (골프) 칼럼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칼럼만 하더라도 단순한 스포츠칼럼이라기보다 차원 높은 철학 내지 사회심리학의 역사칼럼을 읽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포츠기사의 가독률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신문의 부수가 좌우되는 상황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스포츠기사와 칼럼에 대한 검토와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스포츠는 그것이 민속 (民俗) 경기가 아닌 이상 국제적인 공통의 룰과 역사가 있게 마련이며, 그것은 경기력 또는 경기 내용 뿐만 아니라 스포츠기사의 국제비교 내지 국제경쟁력까지도 간과해선 안될 과제를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내가 새삼스럽게 이런 점을 제기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일련의 국제축구경기 보도에서 연유한다.

지난주에 있었던 한국 - 브라질대전 (10일) 과 브라질 - 일본전 (13일) 은 월드컵 지역예선전을 앞둔 한.일 양국의 전력평가란 점에서도 커다란 국민적인 관심사였다고 일컬어져 왔다.

한데 우리나라의 이른바 유력지 보도를 보면 그런 관심사와 기대가 도무지 충족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우선 일본의 유력신문들, 예컨대 아사히 (朝日).요미우리 (讀賣) 와 우리나라의 신문을 비교해 보면 거기에는 많은 차이가 드러난다.

일본은 한 - 브라질전을 상세히 분석보도했을 뿐만 아니라 차범근 (車範根) 감독의 직접 인터뷰까지 크게 싣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중앙일보를 비롯한 유수한 신문들은 브라질 - 일본전을 상세히 분석하기는 커녕 일본의 가모 (加茂) 감독을 직접 인터뷰한 신문조차 없었다.

있다면 겨우 일본신문에 보도된 가모감독의 말을 인용한 것이 고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상대한 브라질의 자갈로감독이 두나라의 전력을 평가한 인터뷰나 발언 내용을 보도한 신문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신문이 지닌 문제의 소재 (所在)가 어디인지 시사해주고도 남는다.

기사취재의 방위 (方位)가 이렇거늘 거기에 수준높은 스포츠칼럼을 말하는 것이 지나친 욕심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규행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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