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더글러스 러시코프 著 '카오스의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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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미국 문화비평가 더글러스 러시코프의 '카오스의 아이들' (원제 Playing the Future) 은 '젊은 문화' 에 대한 연구서이자 옹호서이다 (민음사刊) .1960년대 히피의 피를 이어받은 저자는 갖가지 주변문화가 갖는 현대적 의미를 성찰한다.

특히 생활문화에 대한 비평이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저자는 윈드서핑에서 파워레인저 (미국의 어린이 TV프로그램) , 레이브 (청소년들이 밤에 모여 춤추는 파티)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 현상을 미래의 관점에서 조망하면서 파도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놀기' 위해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를 보여준다.

지난 60년대의 문화운동가처럼 대항문화의 건설을 주장하는 대신 스케이트 보드에서 컴퓨터 게임에 이르기까지 현재 유행하는 하위문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그 속내를 들여다보도록 인도하고 있다.

러시코프는 기술과 문화의 연관을 드러내는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는 스노 보드에서 인식의 틈새를 건너뛰는 비선형적 사고의 진수를 찾아내는가 하면, 애니미즘의 부활을 보고 '기술 샤머니즘' 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영화 '펄프픽션' 에서 비선형적 논리를 발견하고, 만화영화 '심프슨 가족' 에서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끄집어내는 혜안도 갖고 있다.

이 책은 근대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카오스 시대의 비선형적 인식구조와 감각형태가 현대의 문화속에 어떻게 짜여들어가 있는가를 펼쳐 보여준다.

또한 '카오스의 아이들' 은 청소년 '때려잡기' 에 몰두하는 우리의 한심스런 문화 풍토에 시원한 한줄기 소나기를 뿌려준다.

마치 영국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고 말한 것처럼 '아이들의 문화' 에서 무지개를 본다.

그는 그것이 비록 혼란과 혼돈의 구렁텅이로 보이더라도 바로 그 때문에 새로운 활력과 창조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가 아이들의 비디오 '빨간마후라' 에 절망하면서 청소년문화를 계도되어야 마땅한 일탈의 문화로 낙인찍고 있을 때 러시코프는 거꾸로 마약과 레이브를 비롯한 갖가지 주변문화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낸다.

러시코프식으로 풀어보면 '빨간마후라' 는 스크린세대가 열어놓은 '비종말론' 적 사유와 행동의 극치일지도 모른다.

이 카오스의 세계에 우리는 정신이 돌아버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선형적 단순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은 비선형적 복잡성을 기괴함.비일관성.변태로 본다.

디지털 시대의 선두주자인 젊은 사이버족들은 정보와 물질, 기계와 사고, 일과 놀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첨단 기술과 마술을 한데 뒤섞는 카오스의 자식들인 것이다.

저자는 현대의 주변문화에서 이원성의 몰락과 전체성의 새로운 부상을 본다.

선형적 사고의 몰락과 카오스의 부상은 도처에서 눈에 뛴다.

"아이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선형적 사고.이원론.기계론.위계.메타포 그리고 신 (神) 자체를 지나서 역동적이고 전체론적이며 애니미즘적이고 무중력적이며 압축재현적인 문화를 향한 진화의 도정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카오스는 그들의 자연환경이다.

" 아이들이 어른에게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성세대 가운데 종말론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카오스를 껴안아야 한다는 저자의 조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비록 우리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미국의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어쩌면 내일 당장이라도 닥칠 수 있는 미래의 문화지형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백욱인 교수 (사회학.서울산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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