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집단지성, 오해와 착시가 만든 허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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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인터넷 광장에서 오해와 착시를 활용한 여론 조작과 다수 위장은 ‘집단지성’이란 허구를 만들어 냈다. 감각으로 수용한 정보의 파편들을 지성으로 착각한 사팔뜨기 지식인들은 대의 민주정의 폐지까지 공공연히 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보수 지성’으로 꼽히는 소설가 이문열(61·한국외대 석좌교수·사진)씨의 시국 진단이다. 19일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총무 이목희) 초청 강연에서 그는 ‘지난해 봄의 그 사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놓고 불거진 ‘촛불시위’를 말한다. 보수세력이 대선과 총선을 내리 석권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터진 ‘그 사태’. 작가는 이를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종’이자 헌법의 근간인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보았다. 전날 진보 지식인 백낙청(71) 서울대 명예교수에 이어 이씨의 목소리를 듣는다.

◆불복(不服)의 구조화=이문열씨의 강연 주제는 ‘지친 대의 민주정과 불복의 구조화’였다. 일상화된 시위문화가 대한민국과 그 존재 근거인 헌법 자체를 흔들고 있다는 판단이다. ‘다수결 원리’와 ‘대의 정치’라는 초·중등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칙이 다수를 가장한 ‘인터넷 군중’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인터넷 광장의 착시현상은 소수를 다수로 보이게 하고, 익명성 뒤에 숨은 조작은 터무니없는 소수에게 대표성을 안겨주어 다수로 혼동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에 붙어 앉아 인터넷 여론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 밤새껏 경찰의 물대포와 맞서 몸싸움을 하다가 다음날 직장에 나가 업무를 볼 수 있는 이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일 수가 없다는 지적이다. 이씨는 “촛불 시위대가 그토록 다수로 비친 것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대선 불복 세력이 그 사안을 계기로 한 곳에 모여 다수를 조작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작가는 이 ‘불복 세력’이 지난 10년간의 신기득권층, 지난 정권이 정성들여 기른 일부 시민단체 등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이들이 ‘불복’하는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이 정권이 아니라 이 나라 헌법체계의 근간인 대의 민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 완강한 불복의 구조화에 따라 검찰의 기소권과 법원의 판결권까지도 촛불의 승인을 받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전날 백낙청 교수와 이날 이문열 작가는 결론으로서는 둘 다 ‘국민 통합’을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 진단은 판이하다. 백 교수가 “그나마 남은 중소 신문 및 방송계 일각에 국한된 독립언론마저 제거하려는 집권세력의 총공세”를 우려했다면, 이씨는 “지난 시절의 단맛을 지키려고 결사항전을 외치며 촛불을 부추긴 일부 방송”을 ‘불복의 카르텔’에 포함시켰다.

◆MB정부 문제는 소심과 우유부단=집권 2년차를 맞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씨의 평가는 어떨까. 그는 “평가는 아직 성급하지만 이 정권의 소심과 우유부단은 비판하고 싶다. 대운하 같은 대선 공약을 총리가 나서서 추진하지 않는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빼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촛불에 혼비백산해서인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고 지적했다.

질의응답 시간엔 지난 10년 사이에 진보 세력이 장악한 ‘문화 권력’에 변화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이씨는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엄연히 ‘보수 문인’ 세력이 있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어쩌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문단에서 보수 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아무 기여도 못하는 집단이 됐다는 자조다. 작가는 “하지만 지난 10년 간 내가 정권에 의해 불이익을 받은 것도 없다. 지난 10년의 정권이 최소한의 도덕성과 문화주의는 견지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배노필 기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강연 내용은 19일자 21면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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