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오지에 한국을 심는다]4(끝). 카자흐스탄 한의사 김동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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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에 사는 미하일로바 지나이다 (61) 할머니는 요즘 기분이 아주 좋다.

수년동안 시달리던 원인 모를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온갖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선 간단한 진료만 하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 는 것이었다.

몇달전 이웃 사람이 한국에서 온 의사가 용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의사가 있다는 국립과학원 부설병원을 찾았다.

말도 없이 손목을 잡고 뭔가를 생각하던 의사는 몸 이곳저곳에 가는 바늘을 꽂기만 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기를 며칠, 이제 두통은 잊고 지낸다.

한국국제협력단 (KOICA) 의 해외파견 의료단원으로 지난 95년 3월 이곳에 온 한의사 김동선 (金東鮮.34) 씨는 요즘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처음 진료를 시작할 때 그를 찾는 환자는 하루 10여명 정도였다.

고국에서의 정신없던 하루를 생각하면 이역만리 먼 이곳에서 인술 (仁術) 을 펴게 됐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감쪽같이 병을 고쳐내는 명의 (名醫) 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갈수록 환자들이 늘어나 올해초에는 하루 1백30여명의 환자를 돌보기도 했다.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진료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수를 하루 30여명으로 제한해 그런대로 환자를 차근차근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지난 91년 옛소련에서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원칙적으로 의료를 전부 국가에서 책임지는 나라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병원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이 격감해 약품공급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金씨는 예정된 2년의 파견기간이 만료된 올해초 이곳 사람들을 위해 더 봉사하기로 작정하고 오는 99년까지 활동기간을 연장했다.

그는 한때 대구에서 잘 나가는 한의사였다.

89년 대구대 한의대를 졸업한 후 바로 한의원을 개업했다.

결혼도 했다.

대구 시내에서 어느 정도 이름도 얻었고 돈도 상당히 모았다.

얼마든지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편안함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터.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94년 여름 어느날 신문에서 본 광고를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다.

후진국에 파견할 의사를 모집한다는 국제협력단의 공고였다.

부모님은 크게 반대하지 않으셨다.

교사였던 부인 최경미 (崔庚美.32) 씨는 1주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던중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미국이나 일본도 아닌 이상한 나라에서 얼마나 고생하겠느냐고 걱정하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각오가 굳어졌다.

부인도 지금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카자흐스탄인.터키인, 강제이주된 10만여 고려인에 이르기까지 1백여 민족으로 구성된 카자흐스탄은 중국과 인접한 때문인지 동양의학, 특히 침술 (鍼術)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말이 잘 안통해 진료에 어려움이 적지 않은 것이 문제. 혈색을 보고, 진맥과 청진기등을 통해 환자를 진단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이 문제는 고려인 간호사 김옥남 (金玉男.52) 씨 도움으로 어느정도 해결하고 있다.

한약재등 필요한 약재는 전량 서울에서 공수해온다.

기본적인 진료장비와 함께 KOICA에서 소규모 프로젝트 지원비로 연 1만달러 (9백만원) 를 지원해주고 있다.

1년에 서너차례 지방 순회진료를 나갈 때는 이곳 대사관에서도 활동비를 지원해준다.

그밖에 모교인 대구대 한의대와 대구시한의사회.대한한의사회에서도 지원해줘 진료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렇지만 몰려드는 환자들을 다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金씨는 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요즘 이곳 사람들에게 한국의 한의학을 알리려는 뜻에서 러시아어로 '한국의 한의학' 이라는 책을 쓰고 있다.

의사들을 상대로 하는 전문서적 수준은 아니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의학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한의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음양 (陰陽) 과 사상 (四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한의사회의 지원으로 지난 96년 7월 작업을 시작했다.

현재 초고 (草稿) 는 끝난 상태로 통역을 맡아주는 간호사 金씨와 그녀의 러시아인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작업하고 있다.

그는 오는 10월께 책이 완성되면 각 병원과 도서관등에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알마티 (카자흐스탄) =염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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