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지식 나눔으로 조국에 봉사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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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만난 김운용(78·사진)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의 얼굴은 밝았다. 본지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5개월 가까이 ‘올림픽 30년, 태권도 40년’의 연재를 마친 후였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IOC 위원과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직 등을 불명예스럽게 내놓고 조용히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명예회복이 된 것 같아 기쁘다”며 “정말 많은 사람이 전화를 해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그동안 오해했었다’는 말을 전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뭐가 달라졌나요.

“가장 먼저는 연락이 끊겼던 사람들이 전화를 해온 거지요 해외에 있는 태권도 사범들이 앞다퉈 전화를 해서 ‘인터넷으로 열심히 보고 있다’고 해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전화했고요, 한덕수 전 총리, 함병기 전 대사 등 정말 많은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사마란치는 물론이고 IOC 위원 중 한 50명은 전화를 한 것 같아요. 영문으로 된 게 있으면 보내달라고 해서 몇 개는 영문으로 번역해서 보내줬지요. 헬스클럽, 항공기 승무원 등 만나는 사람마다 ‘잘 보고 있다’고 말을 걸어옵니다.”

-122회를 연재했지만 그래도 못 쓴 이야기가 많을 텐데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 있는지요.

“서울올림픽만 해도 할 얘기가 너무 많지요. 6·25 관련, 청와대 시절, 올림픽 TV 방영권 등 쓰고 싶은 말이 많아 잡담(?)할 시간이 없었어요.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많은데 좀 아쉽긴 합니다. 더 보완해서 책으로 낼 계획입니다.”

-연재 내용을 보면서 필자의 기억력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원래 기억력이 좋은 편입니까.

“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은 좋았습니다. 대학 영어강독 시간에 이솝 우화를 즉석에서 다 외운 건 나 혼자였어요. 영어성경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요. 아주 세세한 건 기록을 참고했지만 이름이나 시간, 사건 등 대부분은 머릿속에 있습니다.”

- IOC 위원, WTF 총재, GAISF 회장 등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돼야 했을 텐데요.

“ 체력관리가 중요하지요. 지금도 매일 헬스클럽에서 스트레칭과 근력 운동을 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인삼·녹용 같은 것을 많이 먹이기도 했고요, 제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습니다. 스모·육상·태권도·스케이트 등 운동을 꾸준히 한 덕도 봤지요.”

-내용 중에 어학, 특히 영어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려면 어학과 체력은 기본입니다. 요즘엔 영어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국가관과 소신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중요하고요, 추진력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까.

“6·25와 서울 올림픽이지요. 전쟁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외교관이 꿈이었는데 군인이 됐으니까요. 하지만 미국도 다녀오면서 얻은 게 많았죠.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꿔놓았고 제 인생도 바꿨습니다. 한국이 세계무대에 진출하면서 저도 세계로 나갔죠. 저와 한국 스포츠의 위상이 동시에 올라갔습니다.”

-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요, 그 중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 명을 꼽고 싶습니다. 송요찬·박정희·사마란치입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사욕이 없고, 검소하고,충성심이 강하다는 겁니다. 송요찬 장군은 청년장교 때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 분입니다. 4·19 때 보여준 참군인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가관과 민족의식, 자주국방, 경제발전은 탁월했고, 강한 추진력을 배웠습니다. 사마란치로부터는 뛰어난 식견과 능력, 그리고 올림픽 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배웠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서 아쉬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1인 3역, 4역을 하다 보니까 너무 바빴습니다. 골프도 배우지 못했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는 게 후회됩니다.”

-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요.

“한국은 ‘원로’가 없는 사회입니다. 원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혼자 힘으로 올라선 사람도 끌어내립니다. 삼성과 현대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오히려 깎아내리기 바쁘지 않습니까. ‘미련한 사람은 자기 경험에 의지하고, 현명한 사람은 선배들의 경험에 의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경제위기와 북핵 위기 앞에 놓여있습니다. 명분에 사로잡혀 싸우지 말고 실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그래도 한때 세계를 움직였던 사람의 말을 들어줬으면 합니다.”

- 한국 스포츠가 다시 발전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여러 아이디어가 나오고 있지만 청소년체육부가 생겨야합니다. 21세기에 맞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엘리트 체육과 학교 체육, 생활 체육, 그리고 청소년 문제를 전체적으로 지원하고 조정하는 기관이 필요할 때가 됐습니다. 지금은 국내와 국제 스포츠를 분리해서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게 하나로 움직여야 합니다.”

- 마침 19일에 대한체육회장 선거가 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스포츠에 헌신했고, 앞으로도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자리는 일을 하는 자리입니다. 얼굴마담이 아닙니다. 또 지금은 국제 경쟁을 위해 스포츠외교를 해야하는 시대입니다. 대한민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국제성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겠죠. 모쪼록 좋은 사람이 회장이 되어서 다시 세계로 도약하는 한국 스포츠를 만들어주길 바랍니다.”

- 지금부터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무조건 돕겠습니다. 이름을 빌려달라고 하면 빌려주고, 뛰어달라고 하면 뛰겠습니다. 한국에서 IOC 위원 50명과 아무 때나 전화통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저밖에 없습니다. 만나게 해달라면 연결해주고, 얘길 해달라고 하면 해주겠습니다. 끝까지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연세대·명지대·경기대·청주대·아주대·조선대·한민대· 일본 게이오대 등 많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옵니다. 저의 경험과 지식을 최대한 후배들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글=손장환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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