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가난과 전쟁 속에서도 사랑을 찾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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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라크 나시리야에 갔을 때였어요. 여덟살, 다섯살쯤 돼 보이는 남매가 저희 일행을 따라와요. 여자아이는 한 손으로 동생 어깨를 감싸안은 채 다른 손으로 계속 땅바닥을 가리키더군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보고만 있는데 지나가던 서희부대원들이 슬리퍼를 꺼내 주더군요. 그러니까 여자아이가 얼른 받아 동생에게 신겨주는 거예요. 자기도 맨발이었으면서…."

서울대 외교학과 4학년생 설지인(22)양. 그는 여름방학 때마다 '굿네이버스''이라크 난민돕기 시민 네트워크'등 봉사단체에 참여해 해외 각지를 돌며 봉사활동을 해온 맹렬 여대생이다. 그가 지금까지 모두 90일에 걸쳐 필리핀.네팔.태국.이라크.일본 등 5개국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최근 '스무살, 희망의 세상을 만나다'(동아일보사)라는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는 필리핀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무력감, 자신을 속이려 했던 네팔의 석류팔이 소년을 매몰차게 대했던 데 대한 자괴감 등을 에세이 형식으로 적었다. 봉사활동 현장에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과 만나 풋풋한 우정을 나눈 얘기들도 소개했다.

설양이 해외 자원봉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창원 명지여고 2학년 때. 미국의 코소보 공습으로 허물어진 민가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노인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난 뒤부터였다.

"그 전까지 저는 이렇다할 꿈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부만 열심히 했을 뿐이죠. 그러나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찡한 그 무엇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족을 잃고 흐느끼는 이 할아버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요."

설양은 그 후 아시아.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래서 대학에 진학할 때 주저하지 않고 외교학과를 택했다.

그는 번역.과외 등 아르바이트로 해외 자원봉사 경비를 마련했다. 봉사단체의 일원으로 갔기 때문에 개인 돈은 300여만원밖에 들지 않아 혼자 힘으로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업을 마치면 국제구호단체에 들어가 일할 겁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소외받는 지구촌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경남 창원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부모의 2남2녀 중 셋째인 설양은 "밖으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아직 남자 친구가 없는 게 유감"이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글=김동섭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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