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김혜순 시집 '불쌍한 사랑기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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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몸속으로 들어온 백마' '귓속에서 빠져 나오는 까마귀떼' '몸속에서 오그라붙는 연옥'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 .시에서 이런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들을 만나는 독자들은 당황할 것이다.

김혜순의 시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서정시' 와 '여류시' 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그의 시는 상투적인 고백과 위안의 노래이기를 거부하고, 몇개의 감상의 조각들로 이 황량한 세계와 사물들의 공간을 덮어버리지 않는다.

김시인은 일상의 세계로부터 초월하기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내적 현실을 그려내려 한다.

물론 세상은 평면적인 도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모순과 혼돈의 공간이다.

그래서 김시인은 이 세상의 심층을 닮은 악몽과 환상을 보여준다.

시인의 돌발적인 상상력은 극단에 떨어져 있는 언어와 사물들을 연결시키지만, 그것은 철저히 현대적인 일상적 공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상상력이 자기형식을 탐색하면서 시의 언술은 언어의 불협화음과 내적 경험의 불안과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소통방식을 연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인 '불쌍한 사랑기계' (문학과지성사刊)에 나오는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이성의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과 몸이 맺는 상상적 관계를 말해준다.

시인의 상상적 모험은 사물과 욕망의 흔적을 건너가서 그것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뒤틀린 몸을 만지게 해준다.

그의 시에는 안과 밖, 과거와 현재, 나와 대상이 하나의 시의 육체 안에서 교통하고 살을 섞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몽롱한 착란의 공간이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시 '쥐' 는 '어둠 (밤) /빛 (아침)' 이라는 단순한 이미지의 대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실존적 상상력을 개입시킨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라는 날카로운 표현이 드러내주는 바와 같이 밤과 빛은 실존적인 관계를 맺는다.

시의 화자는 빛에 아파하는 세상의 어둠을 보는 동시에 자기 몸의 '검은 내부' 를 본다.

'빛/어둠' 의 대립은 '내시경' 과 '첫눈' 의 상상력에 힘입어 평면성을 돌파하면서 "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 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 라는 구절과 같이 내면과 깊이를 갖게 되며 입체적이고도 역동적인 실존성을 띠게 된다.

김시인의 여성성이 저 흔한 페미니즘의 상품과도 같은 작품과 구분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세계라는 몸의 상관성을 사유하는, 다시 말하면 결국 '우리 몸의 현실' 을 문제삼는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환한 걸레' 라는 시에서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는 충동은 단순히 여성성의 자기 확인이나 신비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몸을 통해 세계를 읽어내고, 세계를 품고, 세계를 생산하려는 미학적 욕구이다.

그 욕구는 달동네에 물을 길어나르는 여성, 그 여성의 또다른 노동인 걸레질과 같은 일상적 현실의 자리로부터 길러 올려진 것이다.

김시인의 여성성은 세상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시의 몸으로 산다는 의미에서의 열린 여성성이다.

그 여성성은 거듭 인간의 사유, 시의 형식을 시늉으로써가 아니라 진정 아프게 경신함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끈질긴 사랑을 실현하려 할 것이다.

이광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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