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세기를찾아서]27.폴린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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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들어갈 때보다 나오는 발걸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 비극의 현장을 돌아보는 모든 방문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분노와 경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허탈에 가까운 표정들이었습니다. 인간의 양심에 대한 최후의 신뢰가 무너진 허탈함이었습니다. 그것은 2차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자행한 만행이라는 과거의 일회적 사건에 대한 분노나 충격을 넘어선 인간성 그 자체에 대한 절망이라고 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는 비극의 잔해들은 차마 눈길을 주기 어려웠습니다. 인모(人毛)로 짠 모직물에 이르러서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전쟁이라는 집단적 광기를 핑계삼는다 하더라도 살인공장을 건설하여 수백만의 인명을 살해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그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는 죄악입니다.

나는 납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 나오다 아름다운 장미꽃 화단을 만났습니다. 나는 이 저주받은 땅에 피어있는 장미꽃이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을 작은 꽃나무가 위로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에게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전하기 보다 차라리 장미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장미꽃 화단을 발견하기 직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이 가스실입니다. 지클론(Zyklon)B는 5㎏으로 1천명을 살인할 수 있는 독가스입니다. 이 독가스가 2년 동안에 1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가공할 대량살인공장입니다. 지금은 물론 텅빈 콘크리트 공간으로 남아있지만 나의 눈앞에는 당시의 광경이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마치 나의 머리위로 독가스가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으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갑니다.

나는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가까스로 견디면서 서둘러 햇빛이 비치는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스실 옆의 작은 공터에는 교수대가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창설하고 1940년부터 43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수용소장으로 있었던 루돌프 회스(Rudolf Hoss)를 처형했던 교수대입니다. 로프를 걸었던 쇠갈고리만 상단에 꽂혀 있습니다. 가스실의 굴뚝과 나란히 바라보이는 쇠갈고리는 거꾸로 매달린 물음표<?>였습니다.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습니다.

가스실과 교수대를 돌아나오는 나를 맞아준 것이 바로 장미꽃 화단이었습니다. 별로 크지 않은 화단입니다. 길게 피어있는 붉은 장미꽃은 이 참혹한 현장의 아픔을 달래주는 따뜻한 손길 같기도 하고 이곳에서 숨져간 3백만의 영혼 같기도 합니다.

나는 장미꽃 화단 옆에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이 비극의 현장은 이처럼 먼 폴란드 땅에다 둘 것이 아니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라인강의 기적과 나란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차대전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인들의 사죄는 엄숙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웃 일본의 소위‘유감(遺憾)’과 같은 형식적 외교언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유태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이 독일인이며 독일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의 오지에 있는 아우슈비츠는 세상에서 너무 멀다고 생각합니다.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아우슈비츠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책임이 없는 용서와 사죄는‘은폐(隱蔽)의 합의(合議)’입니다.

반드시 베를린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이 세계의 어느 곳이든 기적과 번영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전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2차대전의 참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찬미하고 있는 모든‘번영의 피라미드’에 바쳐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제단(祭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2수용소에는 지금도 철길이 그속으로 벋어 있습니다. 이 철길에서 당신은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들을 가득히 실은 열차가 들어오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이 죽음의 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가재도구와 가방을 들고 굶주린 처자식들과 함께 짐짝처럼 화물열차에 실려와 이곳에 도착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옥의 입구와 같은 몸서리를 떨쳐버리기 위하여 서둘러 영화‘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쉰들러 리스트’는 독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해낸 쉰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절망의 땅에 피어난 한송이의 꽃을 보여주는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크라쿠프에 있는 쉰들러의 공장을 찾아갔습니다. 쉰들러의 현장을 찾아봄으로써 아우슈비츠에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쉰들러 리스트’의 촬영현장이기도 했던 이 공장은 지금은 텔포드(Telpod)전자부품공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창문의 새시와 복도는 영화촬영을 위하여 회색으로 바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이야기는 망설이다 덧붙입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카지나예슈 보야스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영화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점령군 사령관으로부터 법랑냄비 생산공장인 레코르드(Rekord)를 불하받은 쉰들러가 이 공장에 유대인들을 고용함으로써 수천명의 유태인을 아우슈비츠로부터 구해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고용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받는 그의‘장사’였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또 한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었던 스필버그가 쉰들러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극화한 까닭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듣는 쉰들러의‘상혼(商魂)’은 다시 한번 우리를 쓸쓸하게 합니다.

나는 ‘죽음의 문’안으로 뻗어있는 긴 철길을 바라보았습니다. 철길은 이제 잡초만 간간이 자라고 있는‘과거의 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철길 앞에서 느끼는 심정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과연 달리고 있는 죽음의 열차는 없는지. 자기 민족의 번영과 영광을 위하여 다른 민족의 희생 위를 달리고 있는 열차는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철로의 종착역은 어디에 있는지.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집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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