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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화실이 어린 시절의 놀이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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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03면

봉상균 교수 가족 삼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오른쪽부터 봉지희 교수, 봉준호 감독, 하나 건너 박소영 여사, 봉상균 교수, 앞줄 빨간 옷이 봉주연양.

“거의 3~4년에 한 번씩 개인전을 했지요. 올해는 각별하게 재미있게 해보자 해서 가족이 참가하는 식으로 했지. 저노마들이 같이 하재니까 겁내. 아버지 때문에 괜히 우리가 피 보는 게 아니야 하고 말이지. 하하하.” 봉상균 교수가 파안대소했다. 9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린, 희수(喜壽·77세)전을 겸한 개인전 개막식 자리였다. 1965년 경북 공보관화랑에서 연 첫 개인전 이래 열두 번째다. 서울산업대 조형대학 명예교수이자 한국디자인트렌드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문화 DNA - 봉상균, 봉지희,봉준호, 봉주연 3대 전시회

18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큰딸 봉지희(47) 안양과학대 패션스타일리스트학과 교수가 작품 일러스트를, 신작 ‘마더’를 촬영하느라 바쁜 와중에서도 봉준호(40) 감독이 ‘괴물’의 스토리보드로 쓰인 만화를 내놨다. 큰아들 봉준수(48)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딸 주연이(6)가 열심히 그린 스케치도 서너 점 걸렸다. 이날 뒤늦게 개막식에 합류한 봉 감독은 “어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봉 교수는 디자이너 1세대다. 1955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뒤 전과해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회화과에 들어가 가만 보니 그림만 그려서는 배가 고플 것 같더라고. 사회 돌아가는 걸 보니 디자인이 괜찮을 것 같아. ‘그림도 잘 그리는 놈이 왜 전과를 하느냐’고 교수님이 역정을 내시던 모습이 떠오르네. 그때 그냥 그림을 그렸더라면 내 인생이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지.”

그는 농군이었던 아버지도 손재주가 좋은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웬만한 기구는 직접 만들어 쓰고 동네에서 고장나면 도맡아서 고쳤다고 했다. 그가 당시로서는 생소한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시작하게 된 것은 친구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동창인 고 신동우(1936~94) 화백과는 서로 “네가 그린 게 그림이냐”며 허물없이 비판을 주고받던 막역한 사이였다고 들려주었다.

문화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에 근무하던 29세 무렵 결혼했다. “참한 조카가 있다”는 미대 동기동창의 소개로 만난 박소영씨다. 바로 1930년대 모더니즘의 거목 구보 박태원(丘甫 朴泰遠·1909~86)의 2남3녀 중 둘째딸이다. “맘씨 하나는 착하다”며 봉 교수가 웃었다.

65년 당시 효성여대 생활미술학과 창설멤버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사이 사이 한국디자인포장센터에서 연구개발 업무도 맡아 국내 디자인 진흥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대구시 대명동 집의 서재 겸 화실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클래식, 특히 성가곡을 좋아하셔서 항상 음악이 흘러나왔다. 외국에 다녀오실 때마다 항상 디자인이 신기하고 예쁜 물건을 사다주셔서 문화적 충격을 받곤 했다. 미국과 일본의 영화잡지도 많이 보셨는데, 준호는 어릴 적부터 그 책들을 끼고 살았다.”(봉지희 교수)

대학 시절 연세춘추에 만화를 그렸고, 글쓰기에도 재주를 보인 봉준호 감독의 내공 역시 어릴 적부터 형성된 셈이다. 봉 감독은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같은 것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뭐든 맘대로 하라고 하셨다. 쿨하고 유머러스한 분이다. 어머니도 특이한 언어 구사가 많고 섬세한 분”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일찌감치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다졌다는 봉지희 교수는 “아버지는 미술은 힘드니까 음악을 하라고 하셨다”고 털어놓았다. 피아노를 가르치고 음악회에도 항상 큰딸을 끼고 다녔다. “그래도 전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린 적도 많아요. 학생들 졸업작품전을 앞두고서는 밤참을 준비해 학생들을 돕던 아버지 곁에서 밤을 새우던 기억도 새롭죠. 조카 주연이를 보면 딱 제 어린 날을 보는 것 같아요.”

봉 교수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봉 교수는 성당 사목위원(교회로 치자면 장로)을 지냈고 박소영 여사도 레지오 마리에(여성조직단체) 단장을 맡았다. 성당에서 결혼한 봉 감독은 어릴 적 성당의 복사(미사 지낼 때 나서는 사동)를 맡기도 했다. 봉지희 교수는 “성당 제대와 제물, 신부님 옷도 디자인하셨을 정도로 성당 일에 열심”이라고 귀띔했다. 가족들이 정신적 지주로 여기는 김자문 신부도 이날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어느새 손님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전시장에는 가족들만 남았다. 오랜만에 모였으니 고기라도 먹으러 가자고 할 태세다. 두주불사 봉 교수는 술을 끊었다고 했지만, 이날만큼은 기분 좋게 딱 한잔 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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