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미국서 1975년이후 신공항이 하나뿐인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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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소유의 역습 그리드락
마이클 헬러 지음, 윤미나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352쪽, 1만3800원

독일 라인 강가에 있는 수백 채의 성채는 규제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중세 때 이 강으로 수많은 무역선이 다니자 봉건귀족들이 통행료를 받으려고 너도나도 강가에 요금소와 함께 세운 것이 이 성채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많은 곳에서 통행료를 뜯겨 수지가 맞지 않게 된 뱃사공들이 운항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유럽 경제가 입은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중세적 상황이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1980년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전국을 734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휴대전화 서비스 면허를 주었다. 이 때문에 전국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가 어려워졌고, 혁신도, 새로운 사업도 서비스 개선도 어렵게 됐다. 미국의 휴대전화 서비스가 다른 경제 대국보다 광범위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서 비롯했다.

지은이는 이런 상황을 ‘그리드락(gridlock)’이라 부른다. 교차점에서 발생한 교통체증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 이 말을, 지은이는 지나치게 많은 소유권이 경제활동을 오히려 방해하고, 새로운 부의 창출을 막는 현상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예로 공항을 하나 세우려고 해도 수많은 땅 소유자들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1975년 이후 새로 생긴 공항이 덴버 공항 하나밖에 없다.

80년대 중반 제작된 다큐멘터리 ‘아이즈 온 더 프라이즈’의 경우는 더욱 기가 막힌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애를 다룬 이 ‘국민교과서’를 만들면서 제작진은 82군데의 보관소에서 비디오 자료를 모았고, 93군데의 보관소에서 사진 275장을 수집했으며, 노래 120여 곡을 사용했다. 제작자 헨리 램튼은 이를 위해 수많은 저작권 소유자들과 힘겨운 협상을 벌여야 했다. 그러나 공영방송 전파를 탄 뒤 이 영화는 창고에 처박혔다. 재방송이나 DVD에 담는 권리까지 얻어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모두 타결되는 데는 2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는 2006년이 되어서야 재공개될 수 있었다.

94년 지진으로 파괴됐던 일본의 고베도 사례의 하나다. 유지 구간의 고속도로는 눈 깜짝할 새 다시 건설됐지만 개인 소유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주택지역은 몇 년간 잡석만 굴러다녔다. 불만을 가진 세입자 하나가 도시 갱생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소유 시스템 때문이라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미국 건설업계에서는 이런 상황을 ‘어디서든 아무것도 지을 수 없는(Build Absolutely Nothing Anywhere Near Anyone)‘이란 말의 머리글자를 따서 바나나라고 부른다.

미 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부학장인 지은이는 정부와 기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 그리드락을 푸는 데 지혜를 짜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풀어나가면서 새로운 혁신의 기회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길을 막는 전봇대 하나 뽑는 데도 수많은 관청의 결정이 필요한 한국에서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지적이 아닐까.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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