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동식서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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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로 시작하는 대중가요 ‘나그네 설움’을 듣다 보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밥은 동쪽 집에서 얻어 먹고,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는 뜻으로 알려진 말이다.

떠돌아 다니는 주제에 어디에선들 제대로 얻어 먹고 잠을 잘 수 있겠냐만은 그래도 거리낌없는 방랑자의 허허로움이 느껴지는 성어다. 그러나 그 원전의 뜻은 사뭇 다르다. 나그네의 홀가분함이나, 염치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떠돌이의 행색과도 거리가 멀다.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에 한 여인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시집을 보내야 하는 그 아버지가 짐을 덜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 마침 이웃한 두 집에 청년 둘이 있었으니 딸을 이들 중의 하나에게 보내자는 것.

문제는 동쪽으로 이웃한 집의 청년이 돈은 많은 대신 얼굴이 지독히도 못생겼다는 점이다. 서쪽 집 청년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생겼으나 집안형편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궁리를 거듭했던 아버지는 딸이 스스로 선택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웃집 두 청년을 불러다 놓고 딸이 직접 이들을 본 다음 결정토록 하자는 심산이었다. 그 아버지는 이윽고 두 청년을 청해 집에 오도록 한 뒤 자리를 만들었다. 딸에게는 동쪽 집 청년이 마음에 들면 오른쪽 소매, 서쪽 집 청년이 좋다면 왼쪽 소매를 걷어올리라고 당부했다.

딸은 뜰에 서있던 청년들을 유심히 살폈을 것이다. 이윽고 결심의 순간.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딸이 오른쪽 소매에 이어 왼쪽 소매마저 걷어올렸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었다. “밥은 동쪽 집에서 먹되 잠은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

이야기와 시문(詩文) 등을 모아 놓은『예문유취(藝文類聚)』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원칙은 팽개쳐 두고 임의대로 제 편리함만을 취하는 자를 비꼬는 우화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했던가. 전교조와 민노총이 벌이는 행각이 꼭 이 꼴이다. 민노총 간부가 전교조 소속 여성 회원을 성추행한 사건을 두고 두 조직은 이를 감추기에 급급하다.

교장이 여교사에게 커피를 타오도록 한 사건을 두고 거세게 항의했던 조직이 전교조다. 민노총은 인권과 민주를 입에 달고 사는 곳이다. 구호만 앞세우며 원칙을 허물어 버리는 행태는 남편감을 고르는 여인의 심사만도 못하다. 거창한 이념에 앞서 두 조직은 도덕심을 먼저 갖춰야겠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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