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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칼럼> 4개의 카오스 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람은 혼자만의 외로운 정신적 소라껍질이 필요하다.

소라의 몸이 그런 것처럼 사람의 정신은 '연체 (軟體)' 이기 때문이다.

서력 (西曆) 으로 새로운 천년기 (千年紀)에 들어가려는 이즈음 특히 그렇다.

네가지 카오스의 샘이 마구 뿜어나오고 있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첫번째 카오스의 샘은 북한이다.

남한이 원조하는 식량을 실은 배와 경수로 발전소 설비를 실은 배가 자기네 쪽으로 항해하고 있는 그 시간에 북한은 휴전선에서 대포를 조준해 원조 베푸는 쪽을 쏜다.

원조물자를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맞받아 전쟁도 해줘야 하는, 모순으로 엉킨 '복잡성' 을 한국사람은 살아야 한다.

두번째는 경제가 일으키는 와류 (渦流) 다.

저효율에 안주하려는 현실세력과 거기에서 벗어나야 하는 구조조정의 당위성, 이 두 힘이 부딪치면서 와류를 일으키고 있다.

이 속에서 작은 기업, 큰 기업을 가릴 것 없이 쓰러지고 있다.

어음 부도는 마지막 사인 (死因) 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도 때문에 죽었다고 말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고비용 저효율이란 암 (癌) 때문에 죽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러다가 종내엔 은행이 쓰러지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 방아쇠는 외국은행들이 우리나라 은행에 빌려준 빚의 상환을 요구해 오는 데까지 이름으로써 당겨질지도 모른다.

세번째는 문화적 공백이다.

이것은 직접 이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거칠기 짝이 없는 허리케인을 일으키고 있다.

문화는 사람이 열대우림 (熱帶雨林) 을 탈출해 인간사회를 만든 토대다.

문화는 전승 (傳承) 과 교류 (交流) 를 거치며 인류생활의 시간과 공간을 이뤄왔다.

문화의 전승을 매우 잘 드러내는 표의문자가 '효 (孝)' 다.

이 글자는 '爻 (본받을 효)' 와 '子 (아들 자)' 두 글자를 합쳐 만들었다.

'부조의 문화를 잘 본받는 아들이 곧 효자' 라는 뜻이 된다.

문화적 공백은 효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효가 없는 문화의 전승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가공스런 악순환의 함정이다 교육의 '교 (敎)' 자는 '孝' 옆에 '복 (때릴 복)' 자를 붙여 만들었다.

때려서라도 문화를 전승시키는 것이 곧 교육이다.

뒷세대에 전승할 앞세대의 본이 공백일 때 교육은 아예 성립조차 못한다.

요즘은 거꾸로 어른이 아이들을 본받게 되었다.

카오스의 네번째 샘은 정치의 부재 (不在) 다.

우리나라의 지금 정치는 르나르의 한 콩트를 연상시킨다.

소년은 어느 상점의 쇼윈도 바닥에 예쁜 구슬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그것이 미치게 갖고 싶어졌다.

마침 그 쇼윈도 바닥 쪽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나있었다.

손가락을 넣어보았더니 닿을락 말락 했다.

소년은 긴 세월 동안 손톱을 길렀다.

마침내 손톱으로 그것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구슬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정치권력은 대통령에게도, 국회의원들에게도 소년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손에 넣는데만 급급한 대상이다.

일단 손 안에 들어온 다음엔 '공동체의 목적을 달성하는 사회의 능동적 능력' (T 파슨스의 정의) 으로서는 이용하지 않는다.

그저 손 안에 쥐고만 있는 것으로 그 절대적 소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르나르의 소설 속의 소년이 손에 넣고 보니 그 구슬이 아무 소용도 없더라고 느낀 것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손톱을 길러 권력을 훔치는 것으로 끝난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이 과정만 되풀이되고 있다.

정치야말로 카오스 속의 어떤 균형점, 즉 요새 '복잡 시스템' 과학이 말하는 '카오스의 가장자리' (요시나가 요시마사 지음 '複雜系란 무엇인가' 참조) 를 찾아낼 책임을 진 사회적 능력이다.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통일.경제.문화, 그리고 정치 자체의 문제가 풀려갈 단서 (端緖) 이기도 하다.

정치가 능력을 포기하면 개인만 남는다.

아스라한 정신의 바닷가 소라껍질 속의 각자 외로운 양생 (養生) 과 양심 (養心) 이 언젠가는 모여서 사회의 어떤 균형점을 이루게 되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개인이야말로 새로운 천년기를 위한 한국의 시스템과학적 준비일 것이다. 강위석 논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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