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도올 고함(孤喊)] 법의 원칙 넘어 그 까닭을 물어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는 유교의 왕국이라는 조선 사회가 떠받든 경전이었지만 실제로 조선 왕조의 사대부가 읽은 텍스트는 주자가 해석해 놓은 『논어』였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논어(論語)』의 구절들을 용케도 주워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논어』 구절들은 항상 우리가 들어왔던 도덕적 경구와도 같은 뻔한 것들이다. 의외로 『논어』 속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도덕군자 공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 이야기들이 많다. 원양(原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요즘 정치인이나 정부나 #경직된 법 적용 안타까워 #공자의 인정(仁政) 배워야

원양은 공자의 어릴 적부터의 소꿉친구였다. 그런데 좀 칠칠맞지 못하고 주책이 없었다. 어디서든지 상황을 고려치 않고 격에 맞지 않는 노래를 불러댔다. 원양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공자는 친구로서 그 모친의 관을 짜 주었다. 공자는 목수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관 짜는 데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도 원양은 옆에서 노래만 불러댔다. “엄마 죽고 북 치며 노래 불러본 지 오래. 관목의 무늬가 살쾡이 대가리같이 아름답구나. 장도리를 든 친구의 손이 여인의 여린 손처럼 아름답도다!”참으로 쓰잘데없는 노래를 계속 불러제끼는 것이었다. 옆에서 목수일을 돕던 공자의 제자들이 참다 못해 “선생님, 왜 저따위 인간과 관계를 유지하십니까? 빨리 끊어버리십시오” 하니까, 공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골육의 친족관계를 끊을 수 없듯이, 옛 친구와의 우정이란 아무리 싫다 해도 끊을 수 없는 법이란다.”

어느 날 곡부시내 시장거리에서 소꿉친구 원양이 건방지게 한 다리를 척 걸치고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칠십 노구의 공자는 지팡이를 짚으며 원양이 있는 곳으로 왔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내뱉는 것이었다. “자네는 어려서부터 공손하지도 않았고, 커서도 사람들에게 좋게 기억될 만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한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늙어서는 빨리 뒈지지도 않으니, 자네야말로 도둑놈이야(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그리고는 걸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툭툭 쳤다. 이것이 ‘헌문’ 편에 실려 있는 공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공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이 늙는 것만도 서러운데, 아무리 친구라지만 “짜아식! 늙은 놈이 빨리 뒈지지도 않네”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거룩한 인격자의 모습이 아니다. 공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도덕적 인격의 완성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공자의 어수룩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실어 놓은 『논어』의 편찬자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공자는 살아있었다. 친구의 정강이를 툭툭 치면서 거친 말을 내뱉는 공자 의식의 저변에는 무의미하게, 무가치하게 연명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극단적 혐오감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공자는 치열하게 산 인간이었다.

조선사회가 유교의 왕국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논어』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왕국일 수도 있다. 조선왕조에는 『논어』가 읽힌 적이 없다. 오직 주자집주본(朱子集註本) 『논어』만 읽혔다. 다시 말해서 주자가 해석해 놓은 『논어』만이 읽힌 것이다. 그것이 과거(科擧) 시험의 텍스트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집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논어집주』만이 성경(聖經)이었다. 그들이 성경으로 떠받드는 『논어』텍스트가 이미 주석형태였기 때문에 주자의 주석을 제쳐놓고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주석을 낸다는 것은 상상키도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는 놀랍게도 『논어』 주석이 없다. 퇴계도 율곡도 주석을 내지 않았다. 1813년에 완성된 다산의 『논어고금주』가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논어』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이 부재했던 것이다. 오직 주자의 『논어』 해석이라는 도그마만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계가 자유로운 신학논쟁을 거부하고 도그마적 성격을 노출시키는 것도 이러한 주자학 전통의 승계선상에 있다.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가 어떤 이념적 경직성에 묶여 있는 것도 이러한 주자학 전통의 폐해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서도 정부는 법질서의 원칙만을 강조했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 원칙이 누구를 위한 원칙인가를 물어야 한다. 원칙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바로 주자학의 폐해인 것이다.

노나라의 삼환(三桓) 중의 하나인 맹손씨(孟孫氏)가 증자(曾子)의 제자인 양부(陽膚)를 치안을 담당하는 판관으로 임명하였다. 출세한 양부는 자기 선생인 증자에게 와서 치안에 관하여 여쭈었다. 이에 증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치안을 담당한 윗관리들이 도(道)를 잃어버려, 민심이 이반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上失其道, 民散久矣!). 범죄의 정황을 취조하여 그 실정을 파악했으면, 우선 그들을 긍휼히 여겨야지, 사실을 알아냈다고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如得其情, 則哀矜而勿喜!).”

이러한 『논어』의 구절들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민심(民心)을 얻으려면 우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깊이 반성을 해야 하는 것이다. 법질서의 원칙을 묻기 전에 그 소이연(所以然)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를 지낸 사람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대법관의 수장 격의 관직이다. 그는 송사를 많이 처리했다. 그리고 명판관으로도 이름이 났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송사를 듣고 결단하는 데 있어서는 나 또한 남과 같이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기필코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송사를 일으킬 일이 없도록 만드는 정치를 행하는 것이다(聽訟, 吾猶人也. 必也使無訟乎!).”

도올 김용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