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전함 야마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2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하필이면 히로시마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고하게 희생된 시민들이야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만 미군 수뇌부의 입장에선 ‘고도의 전략적 가치를 가진 도시’란 선택 기준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일본 육군 제2총군사령부와 5사단사령부는 물론 미쓰비시중공업 등 수십 개의 군수공장이 밀집한 군사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런 히로시마의 전략적 가치를 더욱 높여준 게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일본 굴지의 군항이자 조선 기지인 구레(吳)였다.

일본인에겐 구레와 얽힌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이 있다. 1941년 구레 해군공창에서 완성된 전함 야마토(大和)는 적국 미국의 함정을 압도하는 사상 최대의 전함이었다. 큰 배에 큰 대포를 갖춰 적의 사정권 밖에서 쏴대면 손쉽게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이른바 ‘대함 거포주의’의 산물이었다. 배수량 7만2800t, 길이 314m의 거함을 일본의 독자 기술로, 그것도 극비 보안 속에서 4년 만에 만들어낸 뒤 일본 군부는 야마토가 있는 한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빠졌다.

하지만 막상 실전에 투입된 야마토가 거둔 전과는 미미했다. 이미 해상전의 양상이 항공모함 탑재기가 주도하는 기동전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야마토는 공학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작전엔 실패한 배였다.

야마토의 최후는 비참했다. 45년4월 오키나와까지 올라온 미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출항한 야마토는 미군기 386대의 융단 폭격을 맞고 침몰했다. 탑승 병사 3332명 가운데 생존자는 276명뿐이었다. 야마토를 호위한 일본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의 모든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전사자 중엔 10대 소년이 많았다. 일본군 지휘부는 그런 결과를 빤히 예상하면서도 ‘1억 총옥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무모한 출항을 감행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최근 구레 유지들을 중심으로 규슈 앞바다에 잠들어 있는 야마토 인양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60여 년간 바다 밑을 떠돌고 있는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든, 돈벌이를 위한 관광 자원화가 목적이든 생생한 역사의 증거를 복원하겠다는 건 전혀 시비 걸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야마토 인양 소식에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광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교훈의 자료로 활용되어야 할 전쟁 유물이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맹목적인 애국심을 부추기는 장으로 둔갑한 사례들을 여러 차례 보아왔기 때문이다. 과거의 오류와 단절하지 못하면 뇌리 속 어딘가에 각인된 형상기억합금이 다시 펴지는 법이다.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