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평>'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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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예술의전당이 마련한'우리시대의 연극'시리즈로 극단 연우의'칠수와 만수'와'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두편이 연이어 공연되고 있다.

번역극과 창작극이 힘겨루기를 하던 20년전“우리의 현실을 뒤에 두고 무슨 연극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창단돼 창작극 개발에 몰두해온 연우의 공연들을 다시 보며 시대와 연극을 생각한다.

86년'서울의 봄'직전에 초연돼 선풍적인 지지를 받았던'칠수와 만수'(오종우극본.이상우연출),그리고 새들도 뜨고 싶어하는 이 세상에 주저앉아'한세상 떼어메고/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하고 소원하는 황지우의 시들을 삽화식 구성으로 무대화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주인석극본.김석만연출).두편은 모두 80년대의 사회인식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야하는 연극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화제작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당시의 현실에 너무 밀착돼서일까? 공연 텍스트에 상징을 풍부히 담아주던 시대적 컨텍스트가 빠져나간 오늘의 공연에서 당시의 무대를 거의 그대로 재현하려는 연출 시도는 맥빠져 보인다.

두 작품 가운데 특히 시대의 고통을 연극적 장치로 형상화하려는'새들도…'에서 그 공허함이 두드러진다.

시의성이라는 버팀목이 사라진 곳을 메울 수 있는 시(詩)적인 형식미나 공연미학적인 완성도,그리고 형식의 새로움이 모색되지 않은 공연은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의 가치를 발굴해내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서성거릴 뿐이다.

배우들의 몸짓에서는 저항의 에너지가 빠져있고 자유소극장에 넓게 벌려 놓은 무대에서 시각적인 긴장감은 사라져 버렸다.

무엇보다도 억압적인 상황과 좁은 소극장에서 땀내와 분노를 주고받던 지난날의 관객들이 사라져 버린 지금,예술의전당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과거의 화제작을 감상하려는 오늘의 관객들에게 이들 작품의 유효기간은 지나가 버린 듯하다.공연이 묘사하는 현실은 울림이 없고 무대에서 제시하는 방향은 이미 지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살아있는 배우를 통해 현실이 세워지고 그것이 오늘의 관객과 교감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이다.이번 공연은 그 사실이 간과된 채 회고전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관객에 대한 영향력이 반감돼 버렸다.

그러나 거기에는 앞으로 진행되는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편승해서 날렵하게 날아가 버릴 수 만은 없는 세대의 망설임이 드러나 있다.

이 진공의 90년대말에 세상을 뜨고 싶어하나 차마 발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과거를 되풀이하는 허전한 몸짓이 어디 우리시대 연극만의 일이겠는가. 이혜경(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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