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경제 구원투수의 선발흉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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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급야구로 올라갈수록 투수도 전문화된다.선발투수와 구원투수의 구분이 그것이다.게임을 끌어나가는 역할도 다르고 공의 구질,투수의 성격까지도 다르다고 한다.

경제를 끌어나가는 부총리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야구의 투수에 비유한다면,강경식(姜慶植)부총리는 구원투수 쪽일 것이다.앞서의 선발투수나 계투요원들이 그르친 게임을 살려내기 위해 기용된 마지막 구원투수라고나 할까.대체로 구원투수는 노련하다.체력은 모자라도 한두회 정도의 전력투구로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 주임무다.한물갔다는 선동열(宣銅烈)선수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것이 좋은 본보기다.

많은 사람들이 姜부총리에 건 기대는 뛰어난 지략과 경륜으로 난국의 경제를 수습해 달라는 것이었으리라.더이상의 실점을 막고 혼란의 분위기를 추스르는 위기관리의 짐을 그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姜부총리가 뿌려대는 구질(球質)은 그게 아니다.홈런 한두방 얻어맞는 것쯤은 상관없다는 식으로 소신껏 던지는 모습이다.구원투수의 조심성보다는 선발투수의 담대함과 과감한 승부구로 일관하고 있다.일을 수습하는 쪽이라기보다는 벌이는 쪽이고,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것보다는 장기계획을 세우는데 관심이 더 많다.실제로 姜부총리 취임 이후 특유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각종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최근에 발표한 중앙은행 제도개편 문제를 비롯해 자금세탁방지법 입법,차입금 과다기업에 대한 중과세정책,21세기 국가과제 선정작업에 이르기까지. 어찌보면 이번 정권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국회통과조차 의심되는 일까지도 그는 서슴없이 밀어붙이고 있다.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아이디어를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내고 있는 분위기다.80년대부터 그가 늘상 강조해 왔던 한국경제의 구조개혁 작업을 정치적 혼란기를 무릅쓰고 실천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역시 구원투수다.당장 한보.진로등 대형 부실기업 문제가 현안으로 걸려 있고,그밖에도 제3.제4의 후보들이 줄을 서고 있는 마당에 이것들의 교통정리를 접어두고 21세기를 논할 순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4일 발표한 은행소유구조 개편 문제만 해도 그렇다.금융기관의 감독체제를 어떻게 하느냐에 앞서,선결돼야 하는 은행책임경영제도 구축은 정작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이다.姜부총리도 이같은 일의 선후를 모를리 없을텐데 안타까운 노릇이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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