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우러진 삼베의 미학 - 장연순 섬유예술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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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빳빳하게 풀을 먹여 칼칼하게 날을 세운 삼베. 더운 여름날 바람이 술술 통하는 겉옷감에 제격일 삼베천에 빛을 통과시켰다.날이 선 삼베의 올 사이를 빠져나간 빛이 은은한 색조로 변하면서 삼베를 마치 존재가 없는 가벼움,그 자체처럼 보이게 한다.

한국의 여성이라면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삼베에 빛을 쏟아부어 표현한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인사갤러리(735-2655)에서 24일까지 열리는 장연순(張蓮洵.47)씨의 섬유예술전이다.벽면과 설치작업등 20여점이 소개중이다.단순히 빛을 여과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장씨는 삼베를 일으켜 세웠다.풀을 세게 먹여 똑바로 세운뒤 삼각형으로 뒤틀어보기도 하고 사각형 벽걸이도 만들었다.

풀을 먹인 삼베와 그 위에 쏟아붓는 빛을 통해 장씨가 추구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작가라면 늘상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만 장씨는 삼베를 매개로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되묻고 있다.장씨의 작업은 형태상으로는 삼각형.사각형.동그란 공의 모습을 띠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이 빛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형태와 그 그림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와 거기에 대답하는 또 다른 모습의 작가처럼 보인다.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내고 모든 것을 감춘다'라는 제목의 작품은 전통 삼베 보자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다.이 역시 단순한 평면작업은 아니다.풀을 먹인 삼베를 이어붙이고 빛을 통과시켜 빛이 머물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그 공간은 생각이 머무는 공간이다.말하자면 삼베 보자기속에 삶의 애환을 담았던 과거 어머니들의 생각과 자신세대의 여성들이 가진 생각을 그 속에 함께 담아 넣은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자아(自我)에 더욱 다가간 작품은'마음을 보는 눈,몸을 보는 마음'.한자(33㎝)길이로 삼베천을 잘라 한쪽은 올을 풀어헤치고 한쪽은 심이 든 것처럼 딱딱하게 풀을 먹였다.그리고 이것을 이어 정육면체를 만들어 이것을 8개 죽 늘어놓았다.정육면체에는 단 한면만 천이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가운데가 탈색된 채 풀어져있다.마치 눈의 형상이 새겨진 듯하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장씨는 이번 전시가 다섯번째.93년의 네번째 전시까지는 섬유의 재료적 특성에 몰두한 작업이 대부분이었다.자신 존재를 감싸고 있는 과거 여성상(像)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연결시키려는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빛의 통과로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삼베 속에 어머니 세대에의 기억을 투과시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려는 시도가 신선해보인다.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사진설명>

'마음을 보는 눈,몸을 보는 마음'.높이 33㎝,삼베를 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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