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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시시각각

“굿바이, 다보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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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저서 『권력의 이동』에서 무력과 금력에 대한 지식의 승리를 예견한 것은 1990년이었다. 그에 훨씬 앞서 지식의 최종적 승리를 내다보고, 이를 비즈니스 모델로 구체화한 선각자(?)가 있었으니 클라우스 슈바프(70) 세계경제포럼(WEF) 회장이다. 슈바프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변천에 주목했다. 세상이 권력과 돈의 힘만으로 굴러가는 시대는 끝나 가고 있음을 간파한 그는 미래의 진정한 힘은 권력-부(富)-지식의 3각 체제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런 깨달음을 토대로 그는 71년 스위스 알프스 산록의 스키 리조트인 다보스에 정계·재계·학계의 세계적 명망가들을 불러모아 토론과 사교의 장(場)을 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거물급 정치인과 기업가, 석학을 초대했고, 자유시장경제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와 미국의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IHT)을 끌어들였다. 몇 년 만에 그는 세계 유수의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매년 1월 말이면 거액의 입장료를 내고, 앞다퉈 알프스 오지까지 찾아가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높은 참가비 기준(현재 5만 달러)을 통과한 선택된 엘리트들이 모여 세계적 석학이나 정치인들과 고담준론을 나누고, 참가자들끼리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지상 최고의 사교 클럽이 탄생한 것이다. 뉴스메이커들이 워낙 많다 보니 홍보도 필요 없다. 때만 되면 각국 언론이 알아서 대서특필해 준다. 세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비영리 기관이란 고상한 외투를 걸치고,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지식과 인맥 비즈니스의 귀재가 바로 슈바프다.

다보스 포럼은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의 교리를 신봉하는 신도들의 연례 제의(祭儀)로 자리 잡았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어제 개막된 제39회 다보스 포럼에는 90여 개국에서 2500여 명이 참석했다. 지난해와 같은 규모다. 국가 정상급 참가자 수는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렵다고 제사에 빠질 수는 없다는 뜻일까.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경고는 지난번 포럼 때부터 이미 나왔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는 심각한 금융위기의 전조라는 분석과 함께 극소수의 ‘수퍼 리치(super rich)’들과 교활한 투기꾼들의 손에 부가 집중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로 세계경제가 회귀하고 있다는 경고도 있었다. 그러나 포럼에 참석한 그 어떤 석학이나 시장 참가자도 이번 위기를 정확하게 예견하진 못했다.

당연히 반성이 앞서야 한다. 하지만 슈바프 회장은 어제 IHT에 기고한 글에서 다보스 포럼은 창설 이후 줄곧 기업은 주주들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고 강조했다. 또 시장 만능 자본주의의 위험을 늘 경고해 왔다면서 이번 포럼은 위기 이후의 세계 재편을 논의하는 최상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반성은 없고, 자기 합리화와 변명만 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은 총수요 진작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는 케인스 모델로 전환했고, 분배를 고려하는 복지국가 모델을 추구하기도 했다.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을 계기로 자율과 경쟁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가 일세를 풍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경제위기를 계기로 시계추가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할 일을 하는 정부가 중요하며, 좋은 시장이냐 나쁜 시장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자리를 만들고 연금을 지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작은 정부와 시장 만능주의라는 다보스의 교리와 거리 두기를 한 셈이다. 그 탓인지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나 폴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로런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등 미 정부의 거물들은 이번 포럼에 참석하지 않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굿바이, 다보스!” 소리는 워싱턴에서 먼저 들리고 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