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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문제, 아버지만이 결정” 김정남 베이징 발언 뭘 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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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이 24일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한 장면을 일본 후지TV가 촬영했다. [연합뉴스]

 북한 김정일(67)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38)이 설 연휴 중인 24일 베이징 국제공항에 나타나 북한 후계 문제 등에 대해 입을 열었다. 부자 세습 시 이복동생인 정철·정운과 함께 북한 권력의 후계자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김정남의 언급은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정남은 그동안 해외에서 일본 방송 카메라에 종종 포착됐지만, 후계자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김정남은 후계자 문제에 대해 “그건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아버님(김정일 위원장)께서만이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서울 표준어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에 대해선 “함구하는 게 원칙이거든요. 제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어도 말씀 못 드리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김정남은 휴대전화를 걸더니 곧바로 택시를 타고 베이징 시내 5성급 쿤룬(昆崙)호텔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도 그는 “(후계자 문제에) 본인은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3남 김정운의 후계자 지명설을 묻자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며 “동생에게 물어보라”고 답을 피했다. 김정남은 이날 하룻밤 방값이 2400위안(약 48만원)인 이그제큐티브 디럭스룸에 묵은 것으로 파악됐으나 이튿날부터 행적을 감췄다

그는 일본 언론인들로부터 ‘친절한 정남씨’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말투를 썼다. 또 유창한 영어를 섞어 쓰며 국제 감각을 갖춘 인물임을 은연중에 부각시켰다. 현장에서 김정남에게 질문을 던졌던 일본 TBS 방송의 중국 현지 직원 진광수(金光淑) 기자는 “가죽 점퍼와 선글라스를 쓴 김정남은 서울 표준말을 구사했고, 뽀얀 피부에 귀공자처럼 당당하게 행동했다”고 전했다. 김정남을 취재한 일본 기자는 “미리 답변을 준비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런 정황 때문에 김정남이 후계 권력 구도와 관련한 자신의 의중을 외부에 흘려 분위기를 파악하려고 의도된 행동을 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남이 탄 고려항공기에는 지난해 8월 뇌졸중 발병 이후 외국 인사로는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나온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타고 있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왕 부장과 같은 동선을 택할 경우 노출이 극대화된다는 걸 김정남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이 최근 들어 후계 구도에서 다소 밀리는 듯한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하려는 행동이란 평가도 있다. 후계 구도와 관련한 결정권이 여전히 아버지에게 있으며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는 메시지를 외국 언론을 통해 북한 안팎에 전한 것이란 얘기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오랜 외국 생활 때문에 권력 구도 등 북한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분위기를 알고 있는 김정남으로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언론 플레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베이징 공항에 있던 한 일본 기자는 “후계자로 내정된 사람이 수행원도 없이 해외를 다니는 것은 상식 밖”이라며 김정남의 후계자 지명 가능성이 낮다고 분석했다. 그가 후계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을 두고서는 동생들인 정철·정운에게 후계 구도의 무게가 쏠리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란 관측도 있다. 최근 일부 언론이 ‘김정운 후계 지명설’을 보도한 데 대한 불편한 심정을 “동생에게 물어보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란 풀이도 제기된다.

하지만 김정남의 후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특히 사실의 진위를 떠나 후계 문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같은 민감한 대목에 원론적이나마 운을 뗄 수 있다는 것은 김정남의 북한 권력 내 지위를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수시로 베이징과 평양을 왕래하고 왕자루이 부장과 함께 움직였다는 것은 김정남이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권력과 여전히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김정남이 장남으로서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고 세습 시 다른 두 아들과 함께 비슷한 조건에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관계 당국자는 “김정남도 후계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구체적 언급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이런 저런 설은 많이 있으나 후계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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