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상 뱃속 보물 도둑 극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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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똑-똑-똑.” 나지막한 소리가 산사(山寺)의 초가을 적막을 가른다.자정무렵,경북안동 광흥사 법당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온 이 둔탁한 음향은 부처님의 복장(腹藏)을 터뜨리는 소리였다.

불복장(佛腹藏).불상의 내부에 불경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건을 넣어두는 것.이는 부처의 껍질속에 성스러움을 불어넣는 행위에 해당한다.몸과 마음의 관계쯤으로 이해하면 쉽다.

불복장은 타임캡슐을 연상시킨다.불상의 배엔 불경 뿐만 아니라 옷·곡식·약재·향료등 일상생활 용품도 들어있기 때문이다.햇빛과 바람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밀폐공간에서 유물들은 수백년을 견뎌왔다.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단정한 저고리 차림의 조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목적이 타임캡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불복장이기에 언제 꺼내라는 식의 약속이 돼 있을리 만무하다.영원히 감춰져 있어야 마땅할 이 유물들은,그러나 계속 우리앞에 나타난다.복장이 터지고 있는 탓이다.

불상이 낡아 더 이상 모시기 곤란해져 새로 꾸미는 ‘개금불사(改金佛事)’때도 복장유물을 꺼내기는 한다.하지만 이는 몇백년에 한번쯤 있는 일이다.그보다 불상을 부수고 불복장을 터는 도굴꾼에 의해 햇빛을 보는 경우가 훨씬 많다.

“똑-똑-똑.”지난해 9월 광흥사 불상의 등을 깨고 복장물을 턴 장본인은 하모씨 형제.이들은 훔친 물건을 어느 교수에게 감정의뢰했다.고려시대 금사경(金寫經·금가루로 쓴 불경)을 받아본 교수는 불복장이 또한번 털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된 흔적이 역력했다.하지만 이쪽 사회에선 감정만 해줄 뿐 입수경위등은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교수는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우선 비밀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새로운 문화재들을 볼 수 없게 됩니다.외부 공개를 극히 꺼리는 우리나라 소장자들의 특성상 철저한 보안유지가 안되면 감정의뢰를 해오지 않는거죠.그렇게 되면 폐쇄적인 풍토에서 그나마 어렵사리 이어온 연구활동을 계속하기 힘들어집니다.”

문화재의 외국유출을 방지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나의 눈을 거쳐간 유물은 최종 소장자가 누구라는 것쯤은 알게 됩니다.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진품여부를 물어 오니까요.만약 나같은 사람이 검증을 해주지 않는다면 분명히 불복장은 감정을 위해 외국으로 건너가게 될 겁니다.”

이 교수는 매년 1∼2건씩 새로 털린 복장유물을 접한다.물론 여기엔 국보급·보물급이 종종 포함된다.전국에 불복장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교수가 5∼6명쯤 되니 도난 빈도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물론 적지 않은 경우 이들의 눈을 거치지 않고 해외로 건너가겠지만.

한번 불복장이 털리고 나면 범인이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당한 절에서도 부처님 뱃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국사찰의 보안상태와 도굴꾼들의 솜씨를 고려할 때 무수한 부처님들은 지금 무방비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불복장 도난의 심각성은 정부·학계·불교계가 모두 공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속수무책이다.사찰유물 보존책으로 자체 박물관을 만들었던 7개 사찰중 경주 기림사의 경우 지난 3월 또 불복장을 도난당했다. 최근 한 개금불사 관련회의에 참석했던 인사의 전언. “도난방지차원에서 복장유물을 박물관에 보관하고 새로운 복장물을 만들어넣자는 의견이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주장됐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큰스님의 한마디에 결국 원래 복장물을 되넣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허흥식교수는 얼마전 한 논문에서“체계적인 문화재연구를 위해 불복장을 공개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마치 장기기증을 요구하는 것같아 망설여진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한 소장파 주지스님의 일갈.“각 사찰의 불상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4년임기로 주지스님이 바뀌는 고찰(古刹)의 경우 보존의식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점도 큰 문제입니다.” 문화재관리국의 입장 역시 답답하긴 마찬가지다.“사태의 심각성은 충분히 깨닫고 있지만 현재로선 사찰의 자체적인 보존노력을 기대하는 것 외엔 별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번에 광흥사를 턴 하씨형제는 약8개월만에 붙잡혔다.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도난당시 주지스님은 어찌된 영문인지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불경을 백만번 외우면 되찾게 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한데 거래과정에서 싸움이 일어났고 불만을 품은 편에서 제보를 하는 바람에 붙잡혔다는 소문이다.이들이 실토한 사찰털이 행각만 해도 최근 2년간 다섯차례.하지만 제대로 신고된 경우는 없었다.그러고 보면 어이없는 내분으로 범죄행각이 드러난 건 주지스님의 불경이 정말로 효력을 발휘한 덕이 아닐까. 지금도 어디선가 들릴지 모르는“똑-똑-똑”소리.부처의 복장이 터지고 스님의 복장이 터지고 우리 복장도 함께 터진다.정말 복장 터질 일이다.

강주안 기자

<불복장이란 - 불상속에 경전.信者옷등 소장>

불복장은 불상에 경전을 넣어 신비로움을 불어넣는 동시에 신자의 옷이나 곡식등을 넣어 행복을 바라는 기복신앙적인 요소도 갖고 있다.일본에서는 인간의 장기(臟器)와 일치하도록 복장물을 넣어야 한다는 오장육부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 불복장의 역사는 7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300년대 이후의 것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원칙적으론 예외없이 불경이 들어있고 오곡(五穀)과 오향(五香)등을 담은 후령통(喉鈴筒)도 빠뜨릴 수 없는 물품이다.여기다가 진주·호박등 오보(五寶)와 인삼·감초·오색실·사리….모두 75가지의 상징물들이 담기게 된다.

복장물중 흥미를 끄는 것은 온양민속박물관에 소장된 1302년 쌀이다.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엔 자포니카(Japonica·길이가 짧고 차진 쌀)만 재배돼온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 복장물에선 인디카(Indica·길이가 길고 가는 쌀)형태의 품종도 발견됐다.우리나라 고대 벼품종의 역사를 재검토해야 할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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