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상투성' 고의적인가 무의식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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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연합군 특공대가 독일군 기지에 들어가 몇명을 때려눕힌후 군복을 빼앗아 입는다.적진 깊숙이 잠입하기 위해….그런데 주인공이 빼앗은 군복은 신통하게도 항상 몸에 꼭 맞는다.

드디어 악당을 처치한다.급박한 상황에서 각기 위기에 처해 있었던 주인공 남녀는 땀범벅의 모습으로 만난다.그들은 입을 맞춘다.애인이 될 수도 없는 사이인 경우에도.

등장인물중 한사람이 잠시 한가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주요 뉴스 한꼭지를 보거나 듣는다.그리고는 어김없이'스위치 오프'. 이어지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너무 뻔한 것에도 아무 생각없이 속는 수가 많다.정치 이야기가

아니다.영화.방송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상투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이른바

클리셰(cliche)다.스테레오타입이라는 말이 판에 박은듯한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전개를 말하는데 주로 쓰인다면 클리셰는 세세한 부분의 상투성,특히

비현실적인 것을 가리킨다.

상투성을 못벗는 이유는 세가지다.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사회적 인식이

반영되는 경우가 그 하나,영화제작자측의 문제,즉

무성의.비용절약.스타만들기의 욕심이 다음이며,엉성한 점이 오히려

관객들을 재미있게 만든다는 것이 마지막 이유다.

◇사회적 인식 탓 하나-.'종합병원'에서처럼 전문직 여성은 연애 때문에

직업에 불충실해지지만 남자는 일 때문에 연애에 불충실하다.액션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언제나 줄거리 전개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여자는 도망가다

항상 발목을 다쳐 넘어진다.그리고 남자의 도움 없이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이것도 성차별일까. 둘-.미국영화에 나오는 아시아.중동계 노인은

거의 입에 격언과 속담을 달고 산다.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외국인 역이라도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대답할때 '예스' 대신'하이''시'등 모국어로만

대답한다.어디든 원주민들은 항상 노래와 춤을 즐기는 축제형이다.미국의

적은 군기가 형편없다.미국 백인우월 의식의 한 단면 아닐까. 셋-.'나홀로

집에'처럼 장다리와 꺼꾸리가 한조를 이루면 장다리는 얼간이고 꺼꾸리는

꾀보다.대머리는 숀 코너리를 빼고는 절대로 여성과 열정적인 입맞춤을

하지않는다.'주라기 공원'에서 보듯 두꺼운 안경을 쓴 사람은 언제나

고민파요,비관적인 먹물이다.사회의 통념이 그대로 들어있는 경우들이다.

◇제작자 탓 하나-.전화하는 사람은 동전이나 카드를 넣지 않는다.주인공이

번호를 돌리자마자 금방 전화가 연결된다.주인공은 자동차 뒷좌석에 숨은

악당을 절대 미리 발견하지 못한다.마구 맞아도 주인공은 다음 순간 반창고

몇개로 치료를 끝낸다.시간과 돈은 아껴야 하고 넣을 이야기는 많고하니

중간생략? 하지만 무성의한 것은 사실이다.

둘-.생일파티에서는'해피 버스데이 투 유'노래만 부른다.사용료를 안줘도

되니까.저작권료를 줘야하는 신곡을 축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폭파장면은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것을 반복해 보여준다.한 영화에 나오는

맥주.음료.자동차.스포츠 제품은 각기 모두 한 상표 뿐이다.

셋-.주인공이 군인이면 항상 다른 장병보다 머리가 길다.리무진은 악당이나

타고 매력적인 주인공은 이국적 분위기의 멋진 스포츠카를

애용한다.'첫사랑'에서 자주 보듯 주인공이 손을 들면 항상 빈 택시가

선다.스타는 절대로 일반인처럼 기다리지 않는다.제작자의 스타 모시기가

눈물겹다.

◇현실과 달라 더 재미있는 경우 하나-.남녀 주인공이 입을 맞추려고

다가가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부르든지 해서 중단시킨다.병에 걸린'러브

스토리'여주인공이 나타내는 증세는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다.주인공이 좀 우울하다 싶으면 곧 비가 내려 분위기를 잡아준다.

둘-.엑스트라는 한방에 쓰러지지만 주인공은 여러발 맞아도 끄떡없다.설혹

죽는다 해도 하고싶은 말 다 한뒤 멋지게 간다.악당은 사로잡은 주인공을

바로 없애지 않고 자신이 하는 큰 일을 보여주며 잘난척 하다가 되레

당한다.위급할 때일수록 자동차 시동은 한번에 걸리지 않는다.액션드라마는

이런 황당한 내용 때문에 재미가 더하다.

셋-.옷을 벗을 때는 위에서부터 시작한다.실험실에선 항상 원색의

화학약품이 부글부글 끓으며 투명한 유리용기에 담겨있다.컴퓨터는 몇자만

치면 찾는 정보를 바로 보여준다.자주 기침하는 등장인물은 반드시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는다.총맞은 사람이 반대쪽으로도 쓰러진다.제작 스태프들의

이같은 과학상식 수준을 보며 관객들은 즐거워할까,지겨워할까. 영화와 방송

드라마의 상투성은 이를 발견한 관객에게 우쭐한 느낌을 준다.“저걸 만든

사람이 나보다 못해”하면서. 하지만 이것은 곧 지겨움을 넘어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여의도에서,검찰청 입구에서,사과상자에서 등장하는 우리들의

상투성은 우울하기만 하고…. 채인택 기자

<사진설명>

아무리 사회적 무의식의 반영이라지만 상투성은 지 겹다.영화에서 그것은

재미를 더하는 부분도 있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상투적 수법에 말려들기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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