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금융개혁, 말이나 하지 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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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은행장은 누가 뽑아야 할 것인가.상식적으로는 은행의 주인이 뽑는 것이 당연하다.정부가 주인인 국책은행이라면 정부가,주주와 이사회가 있는 민간은행이라면 마땅히 은행 스스로 은행장을 뽑아야 할 것이다.

최근의 금융개혁 움직임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왔었다.그러나 정부의 최근 움직임은 많은 사람을 아연실색케 한다.

한보사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은행장 자리가 많이 비게 됐다.산업은행이야 주인인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니 별다른 시비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시중은행들이다.이미 알려진대로 시중은행 가운데 외환은행은 새로운 은행장 후보를 물색중이고,서울은행은 은행장이 사임압력을 받아왔다.두 은행이 모두 새 은행장을 뽑게 된다면 정해진 절차에 따르는 것이 이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두 시중은행을 포함,모두 6개 은행의 신임 은행장내정 명단이 정부쪽에서 흘러나왔다.명단중 일부는 재경원출신 국책은행장이 시중은행장으로 옮긴다는 내용도 있다.외환은행의 경우는'새 은행장은 누구니 그렇게 아시오'라는 통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소식을 접한 금융가의 반응은 한마디로 참담하다.금융자율화니,개혁이니 말이나 하지 말지.한보비리 같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음에도 우리의 금융현실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는 절망감이 감돈다.은행장을 은행 스스로 뽑는 것이 자율화된 금융의 요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정된 은행장 후보들의 개인적 자격이나 능력을 문제삼자는게 아니다.출신이 재경원이라 해서 시중은행장을 맡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절차와 방법이 문제다.우리 금융이 이토록 뒤처진 가장 큰 원인이 정부나 한은이 민간은행 경영에 밤놔라,대추놔라식으로 사사건건 관여해온 관치금융에 있다는 점은 정부 스스로 누누이 인정해왔다.시중은행장 인사에 자율성을 키워주겠다고 비상임이사회제도를 앞장서서 도입한 것도 정부였다.

은행장들이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의 뇌물과 한갓'깃털'의 청탁에 휘말린 결과로 빚어졌던 한보사태 역시 이같은 관치금융의 폐해를 처절할 정도로 보여준 바 있다.

한보사태는 아직도 미해결 상태다.그런데 정부는 한보사태의 마무리작업을 한답시고 또다시 은행장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옛날 버릇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관치금융의 망령은 이토록 지독한 것인가. 손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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