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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엔 유효기간이 없다지만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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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26면

악순환이다. 소비가 줄어드니 물건이 안 팔리고, 공장 기계가 한가해진다. 비용을 줄이기 위한 감원이 이어지고 가계의 소비심리는 더 꽁꽁 얼어붙는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모두가 동참하고 있기도 한 축소 지향의 악순환이다. 지난주 국내외에서 나온 지표들은 하나같이 이 과정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해줬다.

미국 소매판매는 지난해 12월 전년 대비 9.8%라는 기록적인 감소를 기록했다. 9월 이후 4개월째 마이너스이자, 1960년대 이후 유례가 없던 급락 추세다. 특히 대표적 내구 소비재인 자동차는 석 달 내리 20% 넘는 감소세를 보였다. 4분기 미국 비농업 부문 일자리는 51만여 개가 사라졌다. 연간으론 277만 개다.

경기 침체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디플레이션 우려도 커지고 있다. 12월 미국 수입 물가는 1년 전보다 9.3% 하락했다. 기업 재고가 0.7% 줄었지만 판매 감소가 더 빠르게 진행되면서 판매 대비 재고 비율은 오히려 높아졌다. 전 세계 교역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4개월 동안 미국 수출입 규모가 1년 전보다 18% 쪼그라들었다. 일본과 독일은 물론 ‘세계의 공장’ 중국마저 수출증가율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한숨 돌리는 듯했던 금융 부문의 불안도 실적 발표가 나오는 3개월 간격으로 재연되고 있다. 지난해 4분기 실적이 나오면서 씨티그룹과 BOA·HSBC 등 ‘대표선수’마저 미래를 의심받기 시작했다. 집값과 주가 하락에 따른 역자산 효과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가가 기댈 건 기대감뿐이다. 악재에 만성이 된 탓인지 실적 악화와 해고 열풍에도 주가는 상대적으로 잘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해 들어 사정이 더 나빠졌지만 전 세계 주가는 지난해 연말 수준에서 더 떨어지지는 않고 있다. ‘희망엔 유효기간이 없다’는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문제는 희망의 원천이 각국 정부뿐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제로금리로도 부족해 7000억 달러가 들어가는 경기 부양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도 감세와 돈 풀기, 공공사업 확대 등 경기 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총력전의 목표는 소비 살리기다. 그러나 목표 달성은 아직 미지수다. 소비가 되살아나려면 다음 세 가지 중 적어도 하나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고용시장 회복, 소비 성향 또는 외상 소비 증가, 자산가격의 회복이다. 하나같이 단기간에 현실화되긴 어려운 과제들이다.

사방이 모래뿐인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섣불리 움직이기보다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구조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방향도 모르면서 헤매다간 소중한 물과 체력을 낭비해 오히려 일찍 쓰러진다는 것이다. 안개 장세에 둘러싸인 투자자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악순환의 고리가 끊기고 앞날이 보이기 시작할 때 움직여도 늦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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