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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비뚤어진 동문의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얼마전 구속 기소된 김현철(金賢哲)씨 비리 사건을 보면,주요 관련자 대부분이 김현철씨 학교 동창들이다.박태중(朴泰重)씨는 국민학교.중학교 동창이라고 하고,수년동안 불법적인 활동자금을 대어준 기업인들도 고등학교 동문들이었으며,그밖에도 언론에 보도된 연루자 중에는 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창들이 많다.이렇게 동창들이 많이 연루된 것은 김현철씨 자신의 사회경험이 짧아 인간관계가 폭넓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학연(學緣)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우리나라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학창생활을 같이 보낸 친구들끼리 가능한 한 서로 도와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동문들간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의 정도를 벗어나 하나의 배타적 집단을 형성한다고 보일만큼 비정상적인 면이 있다.예를 들어 학교 다닐 때 알던 동창들은 물론이고,상당히 연배차이가 있어 학교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던 사람끼리도 학교 선후배임이 알려지면 곧 강한 유대감을 표시한다.심지어 불법적인 활동을 해도 동창끼리는 서로 덮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마저 있는 듯하다.한보사건에서 기업인과 정치인,혹은 여야(與野)정치인 사이의 뇌물수수 연결고리가 학교 선후배로 연결된 동창들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나,김현철씨가 불법 활동자금을 동문 기업인들에게 부탁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동창들간의 맹목적인 집단의식은 순수한 동문관계를 타락시키고 동창모임의 성격을 변질시키고 있다.기업의 임원들은 정.관계(政官界)로비를 위해 동창관계를 이용하며,정치인들은 돈줄을 얻기 위해,그리고 관리들은 출세를 위한 줄을 잡기 위해 동창회를 이용한다.그러니 어려운 동문을 돕는 모임보다 힘있는 동문 후원행사에 더욱 많은 사람이 모이며,모교 발전을 돕는 사업 위주로 운영되는 외국의 동창회와는 달리 한국의 동창회는 회원들끼리의 친목행사에 더욱 신경을 쓴다. 심지어 일부 대학 특수대학원 과정은 수강생들 대부분이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는 목적보다 동창관계의 인맥을 형성하기 위해 등록한다는 말도 있다.마치 학교가 거대한 세력을 가진 이익집단 형성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꼴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 많은 나쁜 영향을 끼쳐왔다.사실 TK니 PK니 하는

지역감정도 학연에 의한 배타적 집단의식이 심화시킨 면이 있으며,우리나라

교육현장을 황폐화시키는 대학입시 과열현상도 따지고 보면 학연이

중시되는 사회현실이 근본 원인이다.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의식이

존중되어야 할 대학과 지성인 사회마저 이러한 맹목적인 집단의식이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대학교수 채용에서는 아직도 후보자의 출신학교가 중요한

조건이며,후배들은 학문적으로 선배나 스승의 학설이 틀려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다.또한 교수들이 선출하는 총.학장 선거에서도

학연과 지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최근 대학교수들이 대선 예비주자들의 자문단에 대거 참여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여기에서도 어떤 주자를 돕느냐는 결정이 주로 학연과 인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다.후보의 정책방향이 교수 자신의 평소 소신과 일치해

그 정책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가치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단순히

자기가 아는 사람이니까 도와준다는 것은 명분도 없고 동기의 불순함이

의심되는 일이다.

게다가 그 많은 자문교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대선 주자들이 아직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뚜렷한 비전 하나 제시한 바 없고,어느

지역의 맹주(盟主)니 아니니로 시간을 낭비하는 수준이니 답답할

뿐이다.우리나라 정치는 언제나 후보가 제시하는 이념과 비전을 보고

지연.학연에 관계없이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드는 수준이 될까. 불교에서는

모든 인연(因緣)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한다.일반

중생(衆生)들이 그런 경지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지라도,동문수학(同門修學)했다는 좋은 인연을 자신의 탐욕때문에

더럽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모든 인연을'편 가르기'에 이용하는 지금의

행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김현철씨 사건은 이름만 바꿔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교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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