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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재계새별>11. 갑을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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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갑을그룹 박창호(朴昌鎬.49)회장은 한때 재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남들이 외면하는 별볼일없어 보이는 사업도 그의 손을 거치면 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 첫째 사례가 89년의 스리랑카 투자 결정이다.면방업계 최초의 해외투자인 당시의 결정에 대해 업계는 물론 그룹내에서도'무모하다'는 의견이 만만찮았다.현지 정세가 불안하기 짝이 없는데다 대규모 노조파업까지 발생한 곳에 공장을 설립한다는게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朴회장 스스로도“아침에 자고나면 공산 지하단체의 테러로 호텔앞 도로가 피로 흥건했다”고 당시를 기억할 정도였다.

朴회장은 그러나'위기에 도전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소신으로 현지 투자를 강행했다.결과는 성공이었다.스리랑카 공장은 인수 6개월만에 정상가동됐고,가동 첫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지난해말에는 감가상각및 각종 경비를 제하고도 4백만달러 이상의 순익을 내 그룹내 효자업체로 떠올랐다.

두번째 사례는 서울광화문 사옥 매입및 개조.지난해 3월 갑을그룹은 92년 인수한 옛서린호텔을 초현대식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개조해 입주했다.92년 1백82억원을 주고 산 이 건물에 1백60억원을 들여 근거리통신망,동화상회의와 위성방송이 가능한 시청각(AV)시스템,전자카드식 출입통제장치등 최첨단 시설을 갖췄다.주변에선“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고“허세를 부린다”는 비판도 있었다.그러나 개조후 건물 값어치는 껑충 치솟았다.현시가는 8백억원대.개조비를 감안해도 곱절이 넘는 장사를 한 셈이다.되팔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朴회장은 고개를 저었다.“주력업종인 섬유산업도 이 빌딩처럼 최고급으로 탈바꿈하면 엄청난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직원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사옥을 개조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2세체제후 社風혁신 “기업경영도 시대의 영향을 받지않을 수 없다.과거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체제에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경영체제로 전환돼야 한다.” 朴회장이 임직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다.실제로 87년 朴회장 취임이래 갑을의 사풍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얘기를 듣는다.변화를 꺼려하는 보수적 체질에서 젊고 패기에 찬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지난 10여년간 갑을은 ▶면방업계 최초의 해외진출을 통한 글로벌경영 추진▶첨단 컴퓨터및 정보산업으로의 사업다각화▶생산.관리.판매의 전 공정에 걸친 전산화및 사무자동화등 많은 변신을 해왔다.

갑을은 포목상에서 출발해 면방.합섬등 섬유업종을 주력으로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주력기업은 국내 정상급 화섬직물

생산업체인 ㈜갑을과 혼방사.면직물 생산업체인 갑을방적.지난해 두 기업의

매출액 합계(6천4백2억여원)가 그룹 매출(1조2천6백50억여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갑을은 형제가 창업한 기업이다.그룹명도 창업주 형제의 이름 끝자를 따

지었다.지난 58년 대구에서 포목상을 하던 박재갑(朴在甲.23년생.82년

타계).재을(在乙.33년생.92년 타계)형제가 24대의 직기를 들여놓고 시작한

신한견직합명회사가 그룹의 모체가 됐다.

갑을형제의 사업은 순탄했다.60년대 국군의 월남파병에 따른 특수등으로

사업은 급속도로 확장됐다.70년대들어 석유파동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곧

정부의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성장세를 이어갔다.76년 이후

불과 4년동안 다섯개의 회사를 새로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두 형제가 일궈놓은 그룹은 그러나 현재 재갑씨의 장남인 박창호 회장이

이끄는 갑을그룹과 재을씨의 장남인 박유상(朴有祥.40)부회장이 이끄는

갑을합섬그룹으로 분리 경영되고 있다.82년 재갑씨가 별세한 후 5년간

재을회장-창호사장 체제로 운영됐으나 수성을 중시하던 재을씨와

사업확장에 강한 의욕을 보이던 창호씨의 경영노선상 이견으로 87년

갈라서게 된 것이다.

갑을그룹 경영에는 朴회장의 두 동생도 참여하고 있다.시호(時鎬.43)씨가

갑을전자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고 있고 명호(明鎬.36)씨는 신한화섬

사장이다.그러나 막내동생 장호(章鎬.31)씨는 그룹경영과 상관없이 동서증권

대구지점에서 근무중이다.

朴회장은 87년부터 그룹경영을 총괄하며 기존 섬유업종을 바탕으로 발빠른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지난 10여년간 9개의 기업이 갑을그룹의 새 계열사로

태어났다.朴회장은“기업의 수성은 곧 퇴보”라는 신념으로 사업확장에

나섰다고 강조한다.

朴회장이 요즘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글로벌경영이다.지난해

朴회장은 6개월이상 해외에 머물렀다.올들어서도 매달 열흘 이상 해외

생산현장을 누빈다.90년대초에는 오전5시부터 자정까지 해외공장

개조작업에 매달리기도 했다.작업복 차림으로 현지공장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기계에 이상이 있으면 직접 뜯어보기도 한다.심지어 화장실

변기청소까지 점검하는 철저한 현장확인을 한다.

그룹 임원진 가운데는 선대 회장때부터 일해오던 이들이 많지만 최근

사업다각화가 진행되면서 섬유 외의 부문에는 외부영입 인사가

많아졌다.㈜갑을의 이강세(李康世.59)사장은 선경에서 23년간 잔뼈가 굵은

섬유전문 경영인이다.㈜선경 미주본부장과 부사장을 거쳐 92년

영입됐다.임원중 유일하게 그룹회장실과 나란히 서울 사옥 17층에 집무실이

마련돼 있을 정도로 朴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글로벌경영 최대역점 갑을기계 한영섭(韓瑛燮.61)사장은 그룹주력사인

갑을방적의 기틀을 잡는데 많은 공헌을 한 인물.갑을방적 초대 공장장을

역임했다.대구 섬유업계에서는 마당발로 통할만큼 인맥이 넓다.갑을통신

박영수(朴英秀.56)사장은 30여년간 통신분야 외길을 걸어온 정통 엔지니어

출신.95년 갑을통신 사장으로 발탁된 뒤 민수용 통신관련 장비의 연구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조선생명보험 이영택(李榮鐸.66)사장은 88년 조선생명 창립때 대표이사로

선임돼 10년째 경영을 맡고있다.갑을은 지난해 신사옥 입주에 맞춰 21세기

그룹 비전을 담은'비전 21'선포식을 가졌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는다'는 뜻에서다.그룹의 섬유부문 매출액을 2000년에

30억달러(약2조7천억원),2005년에 1백억달러(약9조원)로 늘려 세계일류

종합섬유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청사진이다.

이를 위해 갑을은 세계 각지의 전략 거점을 통해 생산과 마케팅을

활성화하는 한편 원료에서 패션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섬유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유권하 기자 〈다음은 삼보그룹〉

<사진설명>

갑을의 서울 광화문 사옥.옛 서린호텔을 매입,초현대식 빌딩으로

개조했다.작은 사진들은 스리랑카공장 준공식.기술연구소.중국 난퉁(南通)의

현지공장(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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