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금융개혁 연기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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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한국당과 정부가 한국판 금융빅뱅을 위한 개혁과제의 추진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는데 합의한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이로써 지난 몇달간 엄청난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러왔고 앞으로 얼마나 더 치러야 할지 모를 한보금융비리의 재발을 막을 제도개혁은 물건너간 셈이다.이른바 고위당정회의에 모인 인사들이 당장의 경기를 걱정하고 시중자금난을 악화시킬지 모른다고 염려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더더욱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그렇지 않아도 이 모임에 모인 인사의 대부분은 경기불황의 성격이 구조적이고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낙후된 금융산업을 혁신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역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금융개혁은 정권차원의 문제도 아니고 임기와는 상관없는 문제다.한마디로 금융개혁위원회의 활동결과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다음 정권에 가서 3개년계획을 세워 천천히 하자는 것은 개혁하자는 의지를 의심케 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지금껏 대형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재발방지를 위해서는 개인적 비리보다는 제도를 똑바로 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그러나 이것은 잠시고 곧 언제 그런 주장이 있었느냐는 듯이 망각하는 우(愚)를 거듭해온 것이 우리 사회의 실정이었다.이번 금융개혁연기도 마찬가지다.나라밖에서는 불과 며칠전에 영국의 신생 노동당정부가 집권 1주일만에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의 독립을 크게 제고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그런가 하면 독일의 금융빅뱅법이 내년1월부터 시행에 들어가 주식거래와 지주회사에 관한 규제완화가 이뤄진다.우리가 과연 전세계적인 규모의 금융산업경쟁에서 개혁을 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이같은 개혁을 외면한채 생존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까지 자초한 연초 기자회견에서 그래도 국민에게 희망을 준 대목이 바로 금융개혁위원회를 설치해 개혁하겠다는 부분이었다.관료층의 기득권집착과 정치권의 단견(短見)으로 다시 한번 개혁이 좌초돼서는 안된다.당정은 안이하게 개혁을 미루지 말고 우리의 경쟁력강화에 필수적인 금융개혁을 밀고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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