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핵심 비킨 '연금 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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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식 정책기획부 기자

'완화''면제''감면'-.

3일 정부의 국민연금 개선대책을 요약한 석 장짜리 보도자료에는 이런 단어가 여덟번이나 나온다. 지난달 8일 '국민연금의 비밀'이라는 글이 인터넷에 유포된 것을 계기로 연금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커지자 장고 끝에 내놓은 대책이지만 왠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노후 준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불만에 사실상 손을 든 셈이다. 경기침체를 감안해 노후보다는 눈앞의 어려움에 더 신경을 쓴 것이다.

"연금을 폐지하라"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확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카드라고도 볼 수 있다. 연금공단의 모호한 보험료 징수 독려 기준을 분명히 하고, 일부 연금공단 직원들의 고압적 업무 관행에 선을 그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연금 보험료는 제대로 안 내도 되는구나''적당히 줄여 신고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이 번질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소득이 유리알처럼 노출되는 직장인의 피해는 어떤가. 전체 가입자의 평균 소득이 노후 연금 산정 기준인데, 자영자가 소득을 줄여 신고하면 전체 평균소득이 낮아지고 결국 연금 수령액이 줄게 돼 있다. 완화 조치를 적용받는 체납자들도 보험료를 안 냄으로써 노후 연금을 제대로 못 받아 사각지대에 빠지게 된다.

이번 연금 파동은 자영자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웠다. 소득자료가 있는 사람은 자영자의 28.6%(지난해 말 기준)에 불과하다. 자료가 없는 사람에게 보험료를 매길 때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들의 불만이 이번에 폭발한 것이다.

이번 대책이 시행되면 가입자와 연금관리공단 간의 마찰은 많이 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다. 국민연금은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와 비슷하다. 낮은 소득 파악률 등 빈약한 인프라를 그대로 두면 자동차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연금 파동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

신성식 정책기획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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