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해외 칼럼

러시아는 적이 아니라 동반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미국과 유럽은 중요한 전략적 질문에 대한 대답을 19년 동안 미뤄왔다. 옛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세계와 유럽 정치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러시아를 상대하기 어려운 파트너로 취급할지, 아니면 전략적 적대국으로 대할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과 영국·미국에 러시아는 ‘전략적 적대국’이다. 그러나 많은 서유럽 국가들은 ‘어려운 파트너’란 답을 선호한다. 상호 배타적으로 보이는 두 대답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느 것도 철저하게 숙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서방이 러시아를 전략적 적대국으로 생각한다면 러시아와의 협력 의제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한다. 이란과 북한의 핵 문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분쟁 등 지역갈등을 해소하면서 지구온난화, 군비축소, 에너지 안보 등 전 지구적 차원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러시아와의 전략적 대립은 그 같은 협력 전망을 어둡게 할 것이다.

문제는 러시아에 기인하는 위협이 서방으로 하여금 대(對)러시아 전략을 바꿔야 할 정도로 심각하냐는 점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강한 러시아 부활’ 정책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하다. 러시아의 인구는 급격히 줄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성장은 뒷걸음질치고 있다. 인프라는 제대로 구축되지 못했으며 교육과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도 미흡하다. 게다가 러시아 경제는 기형적으로 에너지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지정학적 위치나 잠재력으로 볼 때 러시아는 앞으로도 계속 유럽과 아시아의 중요한 전략요소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해선 안 된다. 러시아를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들이는 것은 유럽의 이해에도 부합한다. 이를 위해선 긴 안목과 자신감에 바탕을 둔 대러시아 정책이 필요하다. 서방의 분열과 허약함은 곧 러시아의 강대국 부활 정책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러시아 정부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틀 안에서 새로운 유럽 질서를 논의하자는 제안을 했다. 러시아는 1990년대 혼란기에 맺은 불평등 협정의 개정을 원한다. 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약화시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옛 소련 시절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러시아의 전략 목표는 서방이 수용하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나토의 중요한 존립근거가 러시아의 공세적 외교정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러시아가 진정으로 새로운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우선 이웃 국가들을 포용해야 한다. 유럽은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이는 데 러시아의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아울러 자유·비밀 선거와 국경 불가침 원칙을 훼손해서도 안 된다. 동시에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방어(MD)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끌어들이려는 서방의 계획은 러시아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야기한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서방은 유럽 안보구도에 관해 새 협상을 원하는 러시아의 뜻을 거부해선 안 된다. 오히려 유럽 내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지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협상을 통해 유럽의 새 질서를 바꾸지 않으면서 이를 러시아가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러시아는 나토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크게 키울 수 있을 것이며, 장기적으로 나토 정회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게임의 룰이 변할 것이며 유럽 안보, 지역갈등 해소, 에너지 안보, 군비축소,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등의 다양한 전략적 목표들이 성취될 것이다. 이런 대담한 시도는 나토를 변화시킬 것이며 동시에 러시아를 더 많이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여기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러시아를 대하는 미국과 유럽의 공통된 입장과 좀 더 단합된 유럽연합(EU)이 그것이다.

요슈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

정리=유철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