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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밥그릇의 비밀 - 청와대 식기는 안주인을 닮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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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누구에게나 밥은 삶이다.동학의 2대교주 최해월 선생은 그것을 ‘밥 한그릇은 만고진리’라고 표현했고 시인 김지하는 밥을 밥상공동체와 생명이론으로 이어갔다.

그러나 음식문화적 관점은 다르다.남자에게 밥은 맛이고 여자에게 그것은 멋이다.멋이라는 단어를 ‘분위기’로 바꿔도 무방하다.그래서 밥을 담는 그릇은 수시로 바뀐다.스타일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그릇에 대한 애착은 높아 고급 수입품에까지 손을 뻗친다.

한국도자기(주).청와대 식기를 만들어 공급하는 회사다.하지만 이제까지 한번도 그것을 공개한 적이 없다.막연하게나마 극비사항처럼 여겼기 때문이다.그래서 전·현직 대통령의 식기는 눈길을 붙든다.

박정희 대통령의 식기는 좀 특이하다.풀잎 문양이 그려진 술병,군대 식판을 연상시키는 사각형 식기와 곡선이 특이한 완두콩 모양 찬그릇.여기에는 무관출신의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청초한 분위기가 섞여 있다.

“대통령 식탁에 일제 식기가 오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국산 본차이나를 꼭 개발해주십시오.” 육여사가 한국도자기 김동수 회장에게 도자기 제작을 의뢰한 것은 73년3월.청와대에서 일본 노리다케사의 본차이나 제품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김회장은 곧바로 영국업체와 기술제휴를 했고 그해 말 국산 젖소의 뼛가루가 섞인 본차이나 제품을 선보였다.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의 새 장이 열린 것이다.함박웃음을 머금었던 육여사는 그러나 이것들을 채 1년도 사용하지 못하고 저세상 사람이 됐다.그래서인지 그 그릇에서 박대통령 말년의 고독이 묻어난다.

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이 식기들은 퇴장했다.이순자여사는 화사한 디자인을 선호했다.선명한 분홍빛 철쭉을 사진에 담아 도자기 회사로 보냈다.알록달록한 꽃무늬가 그려진 화려한 접시들이 청와대의 새 주인을 맞았다.5공시절 내내 대통령 식탁엔 철쭉꽃이 만발했다.

김옥숙여사는 영부인중 그릇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은 사람으로 꼽힌다.매사에 이순자씨와의 이미지 차별화에 고심했던 김씨는 파란 무늬의 소박한 식기를 들였다.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결정과정은 어느 때보다 까다로웠다.“다른 영부인들이 대개 전화를 걸거나 사람을 보내 필요한 사항들을 주문했던 것과 달리 김여사는 저를 청와대로 부르더군요.마음에 드는 무늬가 나올 때까지 여러 차례 견본을 들고가 보여드려야 했습니다.” 육여사 시절부터 청와대 식기 디자인을 맡았던 한국도자기 이현자 이사의 회고다.

하지만 어렵사리 채택된 제품은 오래 가질 못했다.김여사가 약 1년만에 다른 디자인을 요청했기 때문이다.그때 탄생한 것이 귀족풍 다지인 식기.진한 초록 가장자리에 눈부신 금빛 테두리와 문양이 그려졌다.

커피잔 손잡이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노태우 대통령의 커피잔 손잡이 구멍은 유난히 크다.대통령의 굵은 손가락 마디를 감안한 것이다.기본예의는 손가락을 구멍에 끼워넣는게 아니라 손잡이를 세손가락으로 가볍게 움켜쥐는 것.하지만 잔은 주문대로 제작됐다.

뒤이어 청와대 안주인이 된 손명순 여사는 또 하나의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처음으로 전임자와 같은 디자인의 그릇을 사용한 것이다.손여사의 무던한 성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면 같은 6공화국 집권자임을 의식했던 걸까.덕분에 김여사가 주문한 귀족풍 식기는 10년 장수를 누리게 됐다. 지금은 대통령 교체를 위한 준비기간.유력주자들은 정상을 향해 달리고 사람들은 제각각 차기 대통령을 점치기에 부산하다.다음번 안주인은 청와대 식탁을 어떻게 바꿔놓을까.놋그릇이 다시 등장하진 않을테고,건강에 좋다는 옻칠그릇? 현재 사용하는 그릇을 그냥 갖고 들어가는 평범한 퍼스트 레이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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