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사이버 壯元 '에라 만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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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때 좋다 벗님네야 화전(花煎)놀이 가자스라,꽃이 흐드러지게 피면서 봄이 무르익자 모두가 시인이 되자는 취지에서 화전놀이의 한마당으로 사이버 시회가 열렸다.가상공간의 놀이터에 방(榜)이 내걸리길 “다음 시제(詩題)를 보고 그 감상을 적어라”했다.장안의 태백(太白).자미(子美) 지망생들이 방을 쳐다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제철소 회장은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에게 뇌물을 주며 적기(適期)융자를 부탁했다.총무수석은 옆방의 경제수석에게 측면지원을 부탁하고 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다.때 맞춰 은행장에게 뇌물이 제공됐고 시비를 걸만한 정치인에게도 돈이 건네졌다.결국 2년여 사이에 3조원 가량이 대출됐다.그러나 제철소는 끝내 부도를 냈다.한보사건의 진상은 이렇고 관련자는 의법처단될 예정이다.” 한 시객이 먼저 운을 뗐다.

“이것이 세상을 뒤흔든 사건의 전말(顚末)이란 말인가.이 나라의 정치사회를 벌컥 뒤집어놓다시피한 소동의 결말이 이렇게 간단하단 말인가.아서라 말아라 그리들 말아라.”“대기업의 흥망성쇠가 이렇게 간단하게 결정되는줄 정말 몰랐다.거액대출이 마치 무인지경을 내닫듯 성사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기업하기 좋은 세상이 되기는 됐구나!”“그렇게 간단한 사건에 왜 애꿎은 대통령과 대통령 아들의 이름이 거론됐단 말인가.참 그분들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겠네.” 좀 더 심각한 감상문이 뒤를 이었다.

“이 땅에서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정의도 실현되지 않는다.이 점은 군사독재 시절이나 지금이나 똑 같다.검찰의 중수부장이 바뀌어도,수사 축소 압력의 메모가 흘러나와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국회의원들이 증인을 호통치고 달래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정치 쇼에 불과할뿐 진실 규명과는 거리가 멀다.”“대통령 아들이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에 간여했다면 그것은 현 정권의 정치적 미성숙,나아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그것이 곧 법률적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이번 국정조사는 한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것이지 한국 정치의 카오스적 현주소를 찾자는 것이 아니다.두 가지를 뒤범벅으로 섞어 놓으니까 한 가지의 사실 규명도 성취할 수 없는 것 아닌가.아무래도 오늘의 제도와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사법절차 즉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정확했던들 오늘의 불신이 있었겠는가.대형사업을 결정하는 과정이 공평무사했던들 오늘의 부패가 가능했겠는가.참 아쉽고도 아쉽다.”“세계적으로 정치가 더 필요한 시기가 오는데 이렇게 정치가 죽을 쑤고 있으니 어쩌란 말이냐,어쩌란 말이냐.”“다 그런거지 뭐 다 그런거야.” 갖가지 감상문을 다 읽어본 채점관이 모두 마땅치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답안이 제출됐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영웅 호걸이 몇몇이며/절대 가인(佳人)이 그 누구냐/우리네 인생 한번 가면/저 모양이 될터이니/에라 만수 에라 만수.” 채점관은 이 마지막 답안을 장원으로 뽑고 시회를 폐막했다.

뭐,체념과 냉소가 담긴 글이 장원이라고? 그러나 사이버 시회는 가상현실(假想現實)일뿐 현실은 아닐터이니….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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