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청와대 비서관들의 自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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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용태(金瑢泰)청와대비서실장은 요즘 조그만 작업을 지시했다.비서관들중에서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단둘이 찍은 사진을 가진 비서관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라는 것이다.

한보.김현철(金賢哲)씨 의혹 사태가 터진뒤 청와대 내부에도 金대통령의 인사 관리 스타일을 놓고 여러 불만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비서관들은“내가 청와대에 근무하는지를 金대통령이 진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자조(自嘲)섞인 푸념을 한다.

청와대 비서관은 국정의 핵심 실무진이다.그런데 이들이 청와대로 발령나면 그 임명장을 대통령이 아닌 비서실장이 준다.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정부부처 출신들은 2~3년 근무하는데 큰 회의에서나 수석들과 함께 참석해 金대통령을 만날뿐 단독으로 보고한 경험이 있는 비서관은 많지 않다.

金대통령이 누가 비서관으로 들어오는지 떠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그러다보니 행정부내에서는 청와대근무 경험자들이 金대통령에게 가장 비판적이라는 얘기도 나온다.확인결과 11명의 수석비서관을 뺀 전체 52명의 비서관중 34명이 金대통령과 사진을 찍은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서관들이 이런 사정을 털어놓는 것은 사진 때문이 아니다.그만큼 金대통령이 정책결정 과정을 실무 관리하는 자신들과'벽'을 쌓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고 국정 현황을 점검.기획하는 이들을 金대통령이 독려하고 챙겨줘야 하는데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철저한 확인.현장 행정을 펴왔던 박정희(朴正熙)대통령 스타일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심지어 일부 비서관은“金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야심'에만 집착했지,경제 현장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챙기는 것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한다.한보사태가 불거진 한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金대통령은 나라살림에 폭넓게 관심을 쓰기보다 혼자 칼국수 먹고,자신이 그린 결백의 자화상(自畵像)을 보고 즐겼다는 것이다.모 수석은“金대통령이 자신의 위상을 성직자 같이 설정했기 때문에 국정 현장과 민심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지적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 金대통령은 93년2월 취임하면서“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국정에 선악(善惡)으로 접근하는 듯한 기독교 정치인적 체취를 풍겨왔다.청와대는 金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없는 비서관들을 대상으로 金대통령과의 촬영기회를 마련하려고 한다.金대통령과 비서관들을 가깝게 만들려는 것이지만 뒤늦은 이런 움직임에 대다수 비서관들은 씁쓸해하고 있다. <박보균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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