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70代의 망명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진(秦)나라는 원래 춘추시대에 접어들며 겨우 제후의 반열에 든 변방국이었다.수백년간 발전을 거듭해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에 이르기까지에는 여러 고비가 있었다.춘추5패(春秋五覇)에 이름을 올린 목공(穆公,BC 660~621)의 치세가 그 첫 고비였다.

秦나라가 결국 다른 제후국을 따돌리고 경쟁에서 이긴 기본조건은 변방국이라는 사실에 있었다.선진지역에서 새로운 산업기술과 행정기술을 들여와 개발이 안 돼있는 광대한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경제력과 군사력을 크게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진기술을 가져오는 외국인들이 秦나라의 발전에 큰 몫을 맡았다.상앙(商앙),범수(范),장의(張儀),이사(李斯) 등 잘 알려진 이름들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목공의 패업을 거든 외국인으로는 백리해(百里奚)가 있었다.

백리해가 목공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자못 기구하다.원래 그는 우(虞)나라 대부(大夫)로 있다가 우나라가 진(晋) 헌공(獻公)에게 망할 때 포로가 됐다.후에 헌공은 딸을 목공에게 시집보내면서 뒷바라지를 맡도록 딸려보내는 잉신(잉臣)의 천한 역할을 백리해에게 맡겼다.

애초에 목공은 백리해의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백리해는 비천한 위치를

견디지 못해 秦나라로부터 도망쳤다가 초(楚)나라에서 시골 관리에게

붙잡혔다.목공은 뒤늦게 백리해가 뛰어난 인물임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그를 찾았다.그러나 너무 요란을 떨면 초나라가 의심할 것을 걱정해 도망친 하인을 잡아온다고 하며 양피(羊皮) 다섯장으로 백리해를 바꿔 왔다.백리해가 오고대부(五고大夫)로 불리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목공을 보좌하기 시작할 때 백리해의 나이가 70여세였다고 한다.곡절

끝에 대한민국 땅을 밟는 황장엽(黃長燁)씨의 나이도 70대,주체사상을

입안했던 그의 경륜이 오고대부와 비교해 어떠할까.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

앞으로 그가 할 일은 어떤 것일까.

晋나라가 기근을 만나 秦나라에 식량원조를 청할 때,이 기회에 晋나라를

정벌하자는 의논이 있었다.백리해는 晋나라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며

원조를 주장했고,이것이 결국 좋은 결과를 秦나라에 가져왔다.북쪽

식량사태에 대해 黃씨가 어떤 의견을 들려줄지 무엇보다 궁금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